식민지 국책 영화의 '조선색' 최인규 감독의 <사랑과 맹서> (1945)

by.이준희(대중음악비평가) 2013-02-06조회 2,296
최인규

광복 직전인 1945년 5월에 개봉된 영화 <사랑과 맹서(愛と誓ひ)>(최인규)는 여러 가지 면에서 일제강점기 말기 국책영화의 전형을 보여준다. 출연진과 제작진에 조선인과 일본인이 두루 참여한 ‘내선일체’ 시스템도 그렇고, 시종일관 ‘국어’, 즉 일본어로 진행되는 대사도 그렇다. 가미카제 특공대를 미화하고 전쟁 참여를 독려하는 내용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미화와 독려 관련 내용 중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비행기를 몰고 자살공격을 감행하다 죽은 특공대원의 아버지와 아내가 아들이자 남편인 그의 생전 육성이 담긴 음반을 듣는 장면이다. 가미카제 특공대가 출격 직전에 남긴 육성 음반은 당시 실제 존재했던 것으로, 몇 해 전에는 박동훈(朴東薰)이라는 조선인 가미카제 특공대가 <사랑과 맹서> 개봉 두 달 전에 녹음한 육성 음반 실물이 중국에서 발견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아버지가 아들 영정 앞에 무릎까지 꿇고 녹음된 유언(?)을 듣는 모습이 좀 ‘오버’이다 싶기는 하지만, 나름 사실적인 면이 있다.

식민지 국책영화에 등장한 조선의 음악

의도가 분명한 식민지 국책영화이면 다 거기서 거기라고 볼 수도 있겠으나, <사랑과 맹서>에는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비슷한 영화들, 예컨대 1944년 개봉작 <병정님(兵隊さん)>(방한준) 같은 작품과는 대비되는 흥미로운 점이 몇몇 보이기도 한다. 당시 조선 농촌의 풍광을 잘 포착해낸 영상이나 방울을 매개로 남매인지 아닌지 알 듯 모를 듯 전개되는 멜로드라마 요소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독특한 것은 지원병 환송회 장면에 등장하는 음악이다. 지원병이 떠나기 전날 동네 사람들이 모여 환송회를 하는 장면은 <병정님>에도 있는데, 거기서 나온 음악은 일본 민요 ‘기소부시(木曾節)’였다. 반면 <사랑과 맹서>의 환송회 장면에서는 조선의 민요와 대중가요가 등장한다. ‘쾌지나칭칭나네’가 있고, ‘흥타령’이 있고, ‘화초신랑’이 있고, 뽕 따러 가는 노래도 있다. 신명 나게 사물을 두드리며 함께 노래를 부르는 이 장면은 영화 전체에서 유일하게 우리말을 들을 수 있는 장면이기도 하다. 국책영화로서 본분에 충실하자면 <병정님>의 음악이 오히려 당연할 것이니, 그런 면에서 <사랑과 맹서>의 음악은 매우 튀어 보인다. 개봉 직후에 나온 영화평에서도 바로 그 점을 문제 삼아 “조선색(色)을 드러내려고 지나친 기교를 부린 나머지 장행회(壯行會 환송회를 뜻한다)의 장면 같은 것은 넣지 않은 것만 못한 과장이었다.”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사랑과 맹서>로 남은 김용환의 노래 일제강점기 국책영화이면서도 조선색이 드러나는 환송회 장면에서 꽹과리에 장구를 두들겨 가며 노래한 이들은 태평양예능대 단원들이었다. 일제강점기 말기 공연단체 가운데 후발주자이거나 규모가 작은 곳은 ‘악극단’ ‘가극단’ 대신 ‘예능대’ ‘연예대’ 같은 명칭을 사용했는데, 태평양예능대는 1944년에 김용환(金龍煥)이 조직한 단체였다. 유명한 싱어송라이터(1930년대 중반 가수 인기투표에서 2위로 뽑히기도 했다)에다 직접 악극 무대에 서는 배우까지 겸했던 김용환은, 거기에 더해 당대 제일로 꼽힌 음악 가족의 리더이기도 했다. 그의 남동생이 ‘눈물 젖은 두만강’으로 유명한, 그리고 ‘화초신랑’을 부른 가수 김정구(金貞九)이고 여동생 김안라(金安羅) 또한 조선과 일본을 오가며 활동한 인기 소프라노였다. <사랑과 맹서>의 환송회 장면은 음악 가족 김용환 삼남매의 모습을 함께 볼 수 있는 유일한 자료 화면이기도 하다. 김정구는 <사랑과 맹서> 이전에 이미 일본 영화 <의견 좋은 부인 (思ひつき夫人)>(1939)이나 <그대와 나 (君と僕)>(허영, 1941)에도 출연한 바 있으나, 1949년에 세상을 떠난 김용환이 노래하는 모습은 이 영화 외에는 달리 찾아볼 수 없다.

난세에서 ‘딴따라’로 살아가기

<사랑과 맹서>의 감독 최인규(崔寅奎)는 광복 직전에 그와 같은 국책영화를 연출해 친일의 오명을 쓰기도 했고, 8•15 이후에는 <자유만세>(1946) 같은 일련의 ‘광복 영화’를 선보여 정반대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것을 기민한 변신으로 볼지 진솔한 참회로 볼지는 각자의 판단에 맡길 일이겠지만, 여하튼 모두 격동의 시대가 남긴 산물임에는 틀림없다. 그리고 광복 전후가 대비되는 그러한 행로는 대중음악계에서 활동한 김용환에게서도 그대로 발견된다. 1943년 매일신보사 현상공모 군국가요인 ‘우리는 제국 군인’을 작곡한 이가 그이기도 하고, 광복 직후 조선연극건설본부 소속으로 해방 가요 ‘인민의 노래(일명 사대문을 열어라)’를 작곡한 이가 또 김용환이기도 하다. 김용환의 어떤 모습에 더 무게를 둘지는 최인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각자의 판단에 따를 일이지 싶다. 1910년 나라가 망하는 꼴을 보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문인 황현(黃玹)은 인간 세상에서 지식인 노릇 하기도 어렵다는(難作人間識字人) 시를 썼는데, 어디 그뿐이겠는가. 난세에서는 ‘딴따라’ 노릇도 정말 어려운 일이다(難作人間藝能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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