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의 새로움은 흥행의 성공이라는 가장 큰 미신부터 하나하나 버려나가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1983년에 장선우 감독이 ‘새로운 삶 새로운 영화’라는 글에서 했던 말이다. 그는 겨울을 겪고 있는 한국영화의 부활이 상업적 성공을 넘어서 새로움을 추구하는 것에 있다고 말했다. 새로운 영화란 새로운 삶과 무관하지 않다. 그해 발표한 ‘열려진 영화를 위하여’라는 글은 새로운 영화의 형식이 무엇인지를 제시한 글이었다.
열린 영화를 위해
장선우 감독에 대한 가장 적절한 표현은 그가 작가적 질서를 세우는 것을 거부하고 언제나 이전에 자신이 보여준 질서를 파괴하면서 다른 지점에서 영화 만드는 것을 추구한 감독이라는 말일 것이다. 그가 제기한 ‘열린 영화’는 비록 초기작을 형성하는 하나의 원칙이었음에도 꽤나 일관되게 그의 전작을 관철했다고 생각한다. 열린 영화론에서 그는 ‘카메라는 독립된 인격이 되어 상대를 관찰하고, 이야기를 걸며 발언하고 다투기도 할뿐만 아니라, 대상이 비어 있을 땐 그 자리를 메우고 대상이 울고 있을 때 그는 광대처럼 춤추기도 하며, 신명을 불지를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카메라가 대상에 참여하고 논다는 말은 그 실천적 검증 없이 매우 불투명한 가설이긴 해도, 열린 영화가 지향해야 할 카메라의 존재 양식이다. 그것을 우리는 신명의 카메라라고 해두자’라고 말했다. 이런 선언처럼 장선우의 영화에서는 일관되게 카메라의 시선이 강렬하게 느껴진다. 특히나 그의 후기작이 그랬다. 때론 불쾌하게 느껴질 정도의 이미지들이 전시되기도 하고, 차가운 카메라의 시선 앞에 인물들의 미세한 표정과 알몸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사실, <나쁜 영화>(1997)에서 카메라 스크립터를 비추는 시선이나 <거짓말>에서 제이가 인터뷰를 하며 몸을 움츠리는 모습은 그들의 파격적인 정사보다 더 우리를 곤혹스럽게 만든다. 그는 아마도 홍상수 감독이 일상의 비루함을 들춰내기 전에 이미 사회적인 비루함, 거짓말하는 인간의 비루함을 카메라에 담아낸 첫 번째 감독일 것이다.
그의 영화에 대해서 알고 싶은 두세 가지 것들
‘열린 영화’는 그의 영화가 단지 영화에 머물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영화를 만들면서 그가 만들어낸 상황에 반응하는 세계를 관찰하고자 했다. 허구인 영화가 진실로 현실에서 어떤 반응을 일으키는지를 보고자 했던 것 같다. 이것이야말로 초기의 마당극 논의에서 나온 그의 열린 영화론이다. 영화가 그 안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화라는 경계를 넘어서 사회로까지 나아가는 것을 생각하고, 끊임없이 영화를 두고 논쟁이 벌어지고 센세이셔널한 반응들이 초래되는 것. 장선우는 그런 식으로 정치에서와 마찬가지로 영화에서 ‘불화’를 즐겼다. 그의 ‘열린 영화’는 영화 혹은 사회를 연다든지, 영화의 형식 자체를 개방한다든지 하는 시도들로 구성되어 있다. 종종 그의 영화에서 카메라는 중심인물에서 벗어나(혹은 그것에 다가서는 것을 주저하듯이) 갑자기 주변의 다른 사물이나 사람들을 보여주는 것으로 빠져나간다. 마치 하나의 관심영역에서 또 다른 영역으로 조금씩 시선을 이동해서 주변에 관심을 둔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어떤 점에서는 우왕좌왕하는 느낌이 들게도 한다. 고다르가 <그녀에 대해 알고 싶은 두세 가지 것들>(장 뤽 고다르, 1967)에서 ‘둘 혹은 셋’을 확정하지 못하고, 이것일까 저것일까 사이에서 카오스의 지식을 추구했던 것과 닮았다. 이런 혼란스러움이나 불확실성은 <나쁜 영화>나 <거짓말> 같은 경우 다큐와 픽션의 결합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문제는 위계와 중심성의 파괴, 그리고 경계를 넘어서는 형식이다. 가령, <나쁜 영화>에 등장하는 행려자 무리 중에는 배우가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이 공간에 있는 인물을 볼 때 그 안에서 중심인물과 엑스트라를 구분할 수가 없다. 이는 영화적 공간을 모호하게 만들기도 한다. 개봉 버전에서는 삭제되어 있지만 <거짓말>의 시작 부분에서 여자는 기차를 타고 제이를 만나러 가면서 공공장소에서는 다소 듣기에 민망한 성적인 느낌에 대해 말한다. 이때 카메라는 이야기하는 여자와 옆자리의 한 남자를 함께 보여준다. 형식상으로 보자면 다큐멘터리처럼 보이지만 말의 내용을 놓고 보자면 픽션이다. 그래서 두 사람이 한 화면에 보인다 할지언정 과연 그들이 어떤 공간에 위치하는지 의문을 갖게 된다. 장선우 감독이 초기에 제기했던 마당극의 참여적 무대를 빌려 말하자면 이때 영화적 공간은 서구식의 무대와는 달리 픽션과 현실의 인물이(마당극의 참여자와 구경꾼) 구분이 없는 상태에 함께 위치한다고 볼 수 있다. 픽션의 표면 안에 다큐멘터리가, 혹은 다큐멘터리적인 카메라 안에 픽션이 분리되지 않고 함께 존재하는 방식이다.
일찍이 장 루슈는 자신의 인류학적 영화를 말할 때 참여적 특징을 강조했다. 통상적인 서구적 시선에서는 대상을 그대로 촬영하는 것이지만 장 루슈의 카메라는 참여한다고 말한다. 서로가 공동적 참여의 상태가 되어 하나의 축제가 되고, 나는 너가, 너는 내가 되는 것이다. 똑같은 표현을 장선우의 영화론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카메라의 인간선언’이라는 글에서 카메라가 ‘보여준다’는 표현 대신 카메라가 ‘본다’고 말했다. 보여준다는 것이 객관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카메라가 기계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면, 본다는 것은 생물학적인 의미를 갖는다. 전자에서는 카메라가 기계이지만 후자에서는 하나의 생물로 존재해 함께 영화에 참여한다.
지금, 그를 다시 이야기하는 이유
장선우 감독은 영화를, 하나의 사회현상처럼 다뤘다고 생각한다. 그는 언론, 검열, 논쟁 등을 뒤섞은 해프닝의 연출자였고 <거짓의 F>의 오슨 웰스처럼 거대한 거짓말의 작가가 되려 했다. 한국영화가 매끈한 웰메이드로 접어들던 시대에 그는 다른 방식으로 나쁜 영화를, 거짓말의 영화를 만들었다. 흥행 강박의 미신과 상업적 성공을 넘어 새로움을 추구해야할 이때에 그의 열린 영화를 다시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