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후반]Keyword4: 영화평론가 정성일

by.김석영(정성일DB) 2012-11-27조회 1,543

처음 ‘정성일’이라는 이름을 접하게 된 건 라디오를 통해서였다. 자주 듣던 라디오 방송이 지루해 무심코 돌린 주파수 채널에선 교육방송에서나 들려올 법한 강의가 시작되고 있었다. 방송이 끝나고 난 뒤, 방송에서 말한 영화가 내가 아는 그 영화가 맞는지 의심하게 만드는 그 목소리를 다시 듣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1993년 <정은임의 영화음악>을 시작으로 신문 칼럼이나 도서관 서가에 꽂힌 잡지에서 그의 이름을 종종 발견할 수 있었고, 그때마다 그의 글을 유심히 들여다보곤 했다.

나와 같은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PC통신에서는 그의 글을 타이핑해 올리거나, 그의 말투를 모방하는 이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영화를 더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던 시기였다. <한겨레>와 <말>지에 수록된 그의 칼럼이 회자되었고, <정은임의 영화음악>에서 그가 하차한 아쉬움은 1995년 <키노>의 창간으로 메워졌다.

영화에 대한 정보 창구가 PC통신에서 인터넷으로 옮겨가고 있을 무렵, 집에 쌓인 복사지 뭉치를 앞에 두고 그의 글을 모은 홈페이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국립중앙도서관과 여러 대학도서관에 소장된 영화 관련 책과 잡지에서 그의 글을 수집했다. 이윽고 오픈한 홈페이지에는 많은 사람이 방문했고, 그들을 직접 만나 다양한 의견을 교환할 기회도 얻었다.

정성일 키드의 탄생

홈페이지를 오픈한 지 10개월이 지난 2001년 11월, 장충동 ‘성 베네딕도 피정의 집’에서 강의를 하던 그를 찾아갔다. 그는 이미 홈페이지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던 끝에 그에게서 “김석영 씨는 영화를 사랑하십니까?”라는 질문을 받았다. “선생님만큼은 아닌 것 같습니다”라고 답하자, 그는 내게 영화를 사랑한다면 직접 영화를 만들어보라고 제안했다. 난 그러지 못했지만, 그는 9년 뒤 우여곡절 끝에 그의 이름을 내건 영화를 만들었다.

1990년대에 생겨난 수많은 ‘정성일 키드’들이나 영화와 관련된 이곳저곳에 남아 있는 그의 궤적을 정리하다보면, 내가 한국영화사의 일부분을 기록하고 있다는 생각이 이따금 든다. 1998년 11월 < PAPER >와의 인터뷰에서 “최선의 선택은 못했지만, 최선의 노력을 했다.”고 술회한 그의 말처럼, 앞으로도 그는 자신의 자리에서 그렇게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을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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