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호 우리나라 초창기(1923~1926) 영화의 검열대본 <농중조>에 이어 두 번째로 소개할 한국영화박물관 전시 유물은 영화박물관이 아니면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아주 귀한 것이다. 한국영화박물관에는 광복 이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영화 역사를 생생히 입증하는 100여 점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으며, 이 유물들은 우리 영화를 일으키고 발전시켜 오늘에 이르기까지 발판을 마련한 원로 영화인들의 땀과 열정을 가득 담고 있다. 그런 많은 유물 중 당시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전시품이 하나 눈에 띄는데, 바로 6・25전쟁 기록영화 <정의의 진격>을 촬영한 김학성 촬영기사의 코닥 레티나(Kodak Retina) 카메라다.
전시물 소개에 앞서 해방기와 전쟁기 영화에 대한 설명을 하자면 일제 식민지에서 해방된 후 영화인들은 민족영화의 재건을 위해 노력하지만 영화제작 시스템은 무너졌고 기자재도 낙후했으며 필름도 귀했다. 이때 많은 영화가 16mm로 제작됐으며, 심지어 무성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후 전쟁 발발로 한국영화는 더욱 어려운 상황에 처하고 많은 영화인이 국방부나 공보처 소속으로 전선에 파견되어 전쟁 기록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국방부 정훈국 영화과는 당시 <사나이의 길>이라는 영화를 찍고 있던 한형모 감독이 전쟁이 발발하자 국방부에 찾아가 전쟁 기록영화를 찍을 것을 제안하면서 출범했다. 양주남, 양보환, 한형모, 윤봉희, 김보철, 심재흥, 이성춘, 김학성, 임동순, 김종환, 김광희 등이 소속되어 있었으며, 이때 전쟁 기록영화 <정의의 진격>과 <국방뉴스>를 제작했다. 미공보원 영화과(USIS)는 <리버티>뉴스를 제작했으며 임병호, 임진환, 배성학, 김봉수, 김형근, 서은석, 이태환, 이태선, 이경순, 최칠복, 양후보, 김영희, 이형표 등이 소속되어 있었다. 당시 가장 좋은 설비를 갖춘 곳으로서 이후 영화인들 일부가 독립해 후반작업 설비를 마련하고 협동영화사를 설립했는데, 이곳에서 <정의의 진격> 2부를 비롯해 많은 기록영화의 후반작업이 이루어졌다. 그밖에 공보처 공보국 영화과는 이후 국립영화제작소로, 한국정책방송 KTV로 이름을 바꿔 오늘에 이르고 있고. 해군 교재창, 공군 정훈감실에서도 홍성기의 <출격명령>, 신상옥의 <악야> 같은 극영화들이 제작되었다.
다시 전시 유물 소개로 돌아오면, 김학성 촬영기사는 6・25전쟁 당시 국방부 정훈국 촬영대 소속으로 이성춘 촬영기사와 함께 수원 북방 7km 지점의 조그마한 야산에서 미 보병부대의 전투 장면을 찍다가 적의 포탄을 맞는다. 그때 사용한 카메라가 바로 코닥 레티나 카메라였고, 총탄은 카메라 전면 오른쪽을 관통했다. 카메라에 총탄이 뚫고 들어간 흔적은 그야말로 목숨을 건 촬영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또한 촬영기사들은 부상 정도가 심해 이후 회복과 재활에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이때의 일로 김학성 촬영기사는 당시(1952) 국방부 장관으로부터 금성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훈장과 수여증은 영화박물관에 함께 전시되어 있다. 이 밖에도 전쟁 당시 사용했던 군용배낭과 수통, 모자, 완장 등 군용물품들도 함께 볼 수 있으며, 이러한 유품들은 김학성 촬영기사의 자제인 김충남 님께 기증받았다. 이처럼 전쟁기의 영화인들은 목숨을 걸고 종군활동을 하며 영화를 제작했고, 군을 기반으로 한 전쟁 기록영화의 촬영은 광복 이후 물적 기반이 취약했던 영화계에 기자재 확충과 영화 인력의 기술력 향상에 중요한 계기를 제공했다. 이때 활동했던 영화 인력들은 전쟁이 끝나고 영화산업을 재건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영화인들의 이와 같은 생생한 기록영화 제작활동상을 영화박물관에서 관람하면서, 종전 후 한국 영화산업이 재출발하는 데 기반이 되었던 영화인들의 노고와 열정을 아로새기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