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후반은 한국영화의 르네상스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그야말로 다양한 장르의 영화들이 쏟아져 나왔고, 김기덕・홍상수・김지운・허진호 같은 한국을 대표하는 감독들이 한꺼번에 데뷔작을 내놓은 시기이기도 하다. 영화포스터에서도 스틸사진으로 포스터를 디자인하던 시기를 벗어나 본격적으로 포스터를 위한 사진을 따로 촬영하고 디자인을 전공한 전문 디자이너들과 영화 전문 카피라이터들이 참여해 영화포스터를 만들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감독뿐 아니라, 지금도 활발하게 활동하는 영화포스터 디자이너들도 모두 이 시기에 데뷔작을 내놓았다. 그 기념비적인 작품이 될 만한 1990년대 후반을 대표하는 영화와 디자이너들을 소개한다.
01. <악어>(1996)
1996년, 혜성처럼 나타나 지금까지도 관객의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김기덕 감독의 데뷔작. 가장 인상 깊은 물속 장면을 보여주는 이 전단지는 당시 아주 적은 수의 극장에서 영화를 개봉했던 터라 레어 아이템으로 남아 있다. 남채우 디자이너의 작품.
02. <은행나무 침대>(1996)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를 모티프로 한 포스터로 공개 당시 많은 화제가 되었다. 1990년대 초중반 대다수의 한국영화 광고를 기획, 제작한 ‘씨네월드’에서 디자인했고 서양화가이자 영화 를 연출하기도 한 이종혁 감독이 포스터 그림을 그렸다.
03.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
홍상수 영화답게 데뷔작 포스터부터 특별한 아우라를 뽐내는 돼지꼬리 포스터. 배우들의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나오는 최근의 포스터들과 비교해보자면 무척 신선하다. 외국 사진작가의 사진을 이용해서 만든 이 포스터는 ‘씨네라인’에서 디자인했다.
04. <세친구>(1996)
임순례 감독의 데뷔작. 당시 메인 개봉관이던 코아아트홀에서는 영화의 충실한 정보 전달뿐만 아니라 디자인적으로도 뛰어난 소장가치가 있는 전단지를 많이 만들어왔다. 김의수 디자이너가 디자인했다.
05. <미술관 옆 동물원>(1997)
이정향 감독의 사랑스러운 영화. 1990년대 후반에 유행했던 CD 북클릿 사이즈의 독특한 디자인으로 ‘LINK M&D’에서 디자인했다.
06. <접속>(1997)
신선한 타이포그래피와 번지는 듯한 몽환적인 사진으로 통신 세대들의 감성을 잘 표현한 포스터. 그래픽디자이너 김상만의 영화포스터 데뷔작으로 <조용한 가족> <섬> <친절한 금자씨> 같은 포스터도 모두 그의 작품이다. 후에 그는 영화감독이 되어 <걸스카우트> <심야의 FM>등을 연출했다.
07. <비트>(1997)
김성수 감독, 정우성, 고소영의 대표작이자 한국 청춘영화의 명작으로 꼽힌다. ‘필립’에서 디자인한 <비트> 포스터가 극장에 걸렸을 때 수많은 정우성 추종자들은 포스터를 훔쳐가기 시작했다.
08. <나쁜영화>(1997)
우리나라에 거의 처음으로 키치적인 디자인이 무엇인지 확실히 보여준 영화. 포스터, 전단, 보도자료 모두 촌스럽고 희한한 사진과 타이포그래피로 이루어져 있지만, 볼수록 그 매력에 빠져들게 된다. <301.302> <모텔선인장> 등의 영화에서 미술감독을 맡은 미술가 최정화가 이끄는 ‘가슴시각개발연구소’에서 디자인했다.
09. <조용한 가족>(1998)
씨네21 시나리오 공모전에서 수상한 뒤 연출까지 하게 된 김지운 감독의 데뷔작. ‘쉿!’ 포즈를 한 배우들의 콘셉추얼한 사진만으로도 영화를 보고 싶게 만들었던 인상적인 포스터다.
10. <약속>(1998)
배우들의 매혹적인 포트레이트 사진을 이용한 디자인으로, 한국영화 포스터가 이전보다 더욱 세련되고 대중화되었으며 ‘갖고 싶은’ 것이 되었다. <약속>을 기점으로 ‘월드영’이라는 회사에서 한국영화 포스터를 이용한 엽서, 편지지 등의 팬시용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포스터는 <올드보이> <장화,홍련> <살인의 추억> 등을 디자인한 ‘나무디자인’의 작품이다.
11. <처녀들의 저녁식사>(1998)
임상수 감독의 데뷔작. 여배우들의 쭉쭉 뻗은 섹시한 다리 비주얼이 강렬한 포스터로 ‘LINK M&D’에서 디자인했다.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적나라한 여배우들의 대사는 지금 들어도 쇼킹하다.
12. <8월의 크리스마스>(1998)
지금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한국 멜로의 레전드급 영화이자 허진호 감독의 데뷔작. <동갑내기 과외하기> <인어공주> 등의 포스터를 만든 ‘그림커뮤니케이션’ 배광호 디자이너의 첫 번째 영화포스터 작품이기도 하다. 포스터 사진을 찍은 윤형문 사진가는 이후 <약속> <정사> <동감> 등의 감성적인 포스터 사진을 찍었다.
13.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1999)
김태용, 민규동 감독의 존재를 세상에 알린 영화. 전편에 비해 감수성 넘치는 여고생들의 심리를 잘 다룬 작품이다. 그로테스크한 날개 이미지가 인상적인 이 포스터는 <고양이를 부탁해> <품행제로> <복수는 나의 것> 포스터로 유명한 ‘스푸트닉’ 이관용 디자이너의 첫 상업영화 포스터 데뷔작이다. 후에 그는 <여고괴담5>까지 모두 디자인한다.
14. <박하사탕>(1999)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된 이 포스터를 보고, 그 이미지에 매료되었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아직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설경구와 문소리의 클로즈업된 손만으로도 영화의 모든 것을 말해주는 영화포스터의 명작이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파이란> <박쥐>등의 매력적인 포스터를 디자인한 ‘꽃피는 봄이오면’ 김혜진 디자이너의 대표작이자 첫 영화포스터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