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계에 입문한 계기는?
어려서부터 영화를 보러 다녔다. 청파동 일대의 학교나 효창운동장에 설치되는가설극장 같은 곳에 부모나 누나를 따라가서 보곤 했다. <검사와 여선생> <며느리의 설움>같이 변사가 해설하는 무성영화들을 보았다. 확실치는 않으나 신철씨가 변사였던 것 같다. 웃고 울리는 변사의 입담과 활동사진이 아주재미있었다. 대학 다니는 학교 선배가 영화 조감독을 하고 있었는데 “너는 그림을 잘 그리니 나중에 영화감독 하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 그 후 그를 만날 일이 있어 만리동 촬영소에 갔는데 그는 대뜸 자기가 쓰고 있던 기록판을 건네주며 자기가 하라는 대로 기록하라고 했다. 스크립터 일이었다. 하다보니 대학 진학은 나중으로 미뤄지고 그 일에 빠져들게 되었다.
<잃어버린 면사포>로 감독 데뷔를 했는데 어떤 계기가 있었나?
정소영 감독님의 조감독을 할 때 당시 제작부장이던 방규식 씨가 자신이 기획할 테니 감독을 해달라는 제안을 했다. 몇군데서 그런 주문이 있었으나, 급하게 하다가 잘못되고 싶지 않아 사양했는데 자신도 제작자로 입문하는 것이니 함께 데뷔하자는 강력한 설득에 수락을 했다.
데뷔작(1970)부터 1973년경까지 멜로드라마 영화가 상당히 많다. 직접 선택한 것인가?
당시 신파성 멜로드라마가 유행했고 흥행도 잘됐다. 따라서 그런 영화를 할 수 밖에 없었는데 사실 나에게는 그런 신파성이 맞지 않았다. 그런 류의 작품들은 감독이 ‘어떻게 하면 얘기를 슬프게 전개시키나, 어떻게 하면 관객의 누선을 자극할까’ 오로지 눈물을 짜 맞추는 데 매달리면서 화면에 소설을 쓸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회의가 들면서 미스터리라든지 비주얼 강한 영상적인 작품을 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1974년 <분노의 왼발> 등 액션영화를 만들게 되었는데, 어떤 생각이었나?
모든 것이 부족했던 당시에는 영화계에서 제작비 타령만 하고 있었다. 영세한 제작비 때문에 완성도 떨어지는 영화만 만들 수밖에 없다는 자괴감 때문이었 다. 그때 나는 좁은 우리나라 내수 시장만 바라보고 한탄할 게 아니라, 우리 영화 를 해외에 진출시켜 돈을 벌어들여 국산영화에 투자해야 완성도 높은 영화를 만들 수 있지 않나 하는, 당시로서는 불가능한 생각을 했다. 이건 단순한 애국심이나 낙후되어 있는 우리 영화산업을 위한 기특한 발상이 아니라 내가 살기 위한, 내 영화를 살찌게 하기 위한 절실한 소망이었다. 그 생각을 굳히고 나니 문제는실천이었다. 대체 어떤 영화를 만들어 내보내야 외국 관객이 좋아할까, 아니 보아줄까? 그 해법은 각 나라의 언어와 풍습이 달라도 이해하기 쉬운 액션물밖에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일반적인 액션영화는 할리우드가 너무 잘 만든다. 그렇다면 그들이 잘 모르는 색다른 액션영화를 만들어 외국인에게 보여줘야 하는데 그건 동양철학을 바탕으로 한 마셜 아트(Martial Art) 영화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래서 전략적으로, ‘발’을 쓰는 태권영화를 만들기로 작정하고, 서울 변두리 도장에 각종 무술사범 수백 명을 모아놓고 오디션으로 연기 가능자 100여명을 뽑아 집단으로 연기지도를 한 다음, 1973년에 만든 나의 첫 번째 태권영화<용호대련>에 출연시켰다. 그때 보니 우리 젊은이들은 다양한 기능을 갖춰 액션배우의 자질이 매우 풍부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당시 삼류 언론이나 영화계에선 그들을 연기자 취급하지 않고 ‘으악새 배우’라고 했다. ‘으악새’란 ‘새’ 이름이 아니라 맞을 때 ‘으악~! 으악~!’ 한다고 해서다. 가슴 아픈 일이다. 어쨌거나 그들 후배의 후배들이 지금 영화와 TV에서 무술감독과 스턴트 배우로 액션연기를 하고 있다. 초기엔 무술감독도 없어 내가 직접 무술지도를 했다. 한마디로 미쳐 있었던 거다. 한국영화가 세계에 팔려나갈 수 있는 장르는 이것밖에 없다고 생각을 굳혔던 것이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별반 다름이 없다. 1000만 달러를 육박하는 제작 자본의 큰 규모와 첨단기술의 발전 등 수준급 영화 제작이 가능한 제반 여건이 얼추 갖춰진 이때, 우리가 명예만을 위해 영화제 출품용 영화를 만들어 수상만 노릴 게 아니라 세계 영화시장 진출의 첨병 구실을 할 수 있는 특수한 액션영화를 만들어 실익을 취해야 할 때가 되지 않았 나 싶은 것이다. 예술 작품을 만들어야 할 감독이 이런 얘기를 반복하면 어떨지 모르겠지만난 데뷔 초부터 “상은 수단이고 시장이 목적이다”라고 인터뷰할 때마다 틈틈이 얘기했다. 그래서 요즘 우수한 액션영화를 만드는 이명세 감독이나 류승완 감독에게도 <터미네이터>나<다이하드> 같은 액션 대작을 만들어보라고 권한다.
1987년 할리우드로 건너가 <침묵의 암살자>란 영화를 연출했다고 들었다.
그것도 마셜 아트를 바탕으로 한 액션영화다. 그전에 만든 영화 <무장해제>를 미국의 한 배급업자가 수입해 미국에서 개봉했다. 흥행이신통치는 않았지만 미국 영화제작 관계자들은 그 영화를 특별하게 본 모양이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할리우드 영화제작자들이 마셜 아트식 액션영화를 만들 수 있는 감독을 물색하다가 <무장해제>를 보고 연락을 해온 것이 다. 대본을 보내왔는데 그다지 어려운 작품도 아니고 오히려 내 특기인 데다 그전에 미국 올로케이션 작품을 두 편정도 찍은 경험도 있으니, 스태프 5~6명과 함께 가는 조건으로 계약을 하고 캘리포니아 일대에서 찍었다. 남자 배우는 샘 존스, 여배우는 <엑소시스트>에 나왔던 린다 블레이어였다.
<최후의 증인>은 검열로 많은 부분이 삭제된 채상영되었다. 어떤 이유인가?
1980년 검열 때, <최후의 증인> 감독의 사상에 문제가 있다고 누군가 관에 투서를 했다. 당시 그 작을 2시간 46분인가로 마감 편집을 했는데, 극장에서 2시간도 안 되게 상영하더라 개봉 첫날 극장에서 보다가 중간에 나와버렸다. 검열에서 삭제한 것 외에, 연결이 안 되니까 아마도 또 누군가 더 많이 들어낸 것 같다.그래서 영화가 반신불수가 되었다. 그 후 난<최후의 증인>을 내 작품이 아니라고 치부하고 20여 년간 잊고 살았는데 얼마 전 영상자료원에서 그 작품의 원본 버전을 찾았다고 연락이 왔다. 가서 확인하니 감회가 깊었다. 당시엔 검열이 심해서, 예를 들면 ‘군인 얘기는 안 되고, 인민군 괜찮게 그리면 큰일나고’ 하는, 지금의상식으로는 말도 안 되는 검열 관행이 있었다.그래서 검찰청에 불려갔었다. 그 영화엔 빨치산의 인간적인 내면을 표현한 게 있다. 요즘 오리지널처럼 복원된 DVD가 영상자료원에서출시돼 고맙고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최후의 증인>에서 결말은 의외였다.
막바지 촬영 중 라스트를 묻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나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내 머릿속에 라스트가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동안 난 라스트 촬영을 계속 미루면서 나만의 고독한 싸움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그 이유는 주인공인 오 형사가 무고한 사람 하나 살리겠다고 증거를 찾아 전국을 헤매고 다니던 중, 자기로 인해 사람들이 자꾸 죽어나가고, 또 우리 사회의 썩은 구조를 보게 되고, 거기다 인간들의 추악한 내면까지 속속들이 알게 되니…. 그렇다고 오 형사가 황야의 무법자처럼 모조리 쏴 죽이고 표표히 사라지게 하는것은 그야말로 단세포 영화에다 검열 ‘불가’감이고, 또 그렇다고 흥행의 왕이라는 해피엔딩을 억지로라도 만들 수 있는 스토리는 더욱아니고…. 하여간 답이 안 나오더라. 그런 상태로 라스트 촬영 현장에 나가면서도 고민한 결과는, 차라리 오 형사가 죽어서 연민을 받게 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었다. 현장에서 오 형사 하명중 배우에게 얘기하니 그도 답이 안 나오던 차라면서 동의했다. 마침 해가 지는 터라, 촬영감독이 앵글만 돌려 권총자살 장면을 찍었는데 놀라운 것은 자살하는 풀더미에서 수십 마리의 비둘기가 날아오르는 게 화면에 잡혔다. 스태프, 연기자 모두 10개월여를 찍어오 다가 라스트 촬영, 라스트 장면에서 비둘기가 날아오르는 것은 길조라면서 다들 좋아했는데, 어떤 이유에선지 그 영화는 검열을 받자마자 죽었다.
검열의 영향은?
검열을 피해가려는 감독들에게 타성이 붙어서 창작 생활에 부정적 영향을 지대하게 주었다. 당시 사전 대본 검열이 있어서 <뽕>은 네 개 회사를 옮겨다니며 만든 작품이다. 회사마다 사전 검열을 받기 위해 각본을 주무 부서에 넣었는데 번번이 ‘불가’ 판정이 나와, 마지막으로 대폭 수정해 태흥영화사로 옮겨 넣었다. 운좋게 ‘가’가 떨어지더라. 검열 기준엔 과도한 폭력, 과도한 성 표현 등은 안 된다고 했지만 도대체 어디까지가 과도한 것인지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이었다. 내가 사극으로 장르를 옮기게 된 이유 중에는 검열의 영향도 있다. 사극은 일단 사상,정치 문제 등으로 걸릴 것이 없을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그 판단마저 틀린 것이, 사극 <내시>에서 내시감이 반란하는 마지막 장면을 본 검열기관장이‘쿠데타’가 연상된다며 한동안 허가를 내주지 않아 애를 먹었다. 우리나라 영화에 숨통이 트인 것은 대본의 사전 검열 제도가 폐지되고 난 이후부터다.
<초분>에서부터 우리나라의 풍습과 더불어 민간신앙, 샤머니즘의 흔적이 보인다.
동양적인 것, 한국적인 것이 나의 주된 관심사다. 예부터 내려오는 우리 민속을들여다보면 아름다운 것이 많다. 예를 들어, 자식이나 남편이 군에 가면 정화수 떠놓고 그들의 안전을 빈다든지, 전쟁에 나가면 매일 밥그릇을 아랫목에 묻어두고 살아 돌아오길 기다린다든지 하는, 그런 동양적 정서가 우리에게는 신앙처럼 강하게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믿음이 우리 생활 가까이 있으면서 샤머니즘과도 맞닿아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요즘에는 서구의 합리적 사고로 미약해졌지만 내 부모 세대에는 더 밀접하게 남아 있었다. 그 민속의 유래를 거슬러 올라가 뿌리를 캐보면 요즘 세태 뺨치는 재미있는 풍습이 많다. 사실 <물도리동>은 하회탈 정신을 심도 있게 들어가 그 시대의 사회성 드라마로 만들려고 했다. 당시 검열에 걸릴 것 같아서 그렇게 만들었는데, 봉건사회에서 반상의 차별엔 여러 가지 법도가 있었다. 양반과 상민은 같은 높이의 마루에 앉지 못하고, 마주 앉지도, 시선도 마주치지 못하는 등. 양반은 상민들의 생사여탈권을 쥔 절대적 권위였고, 상민들은 공포와 불만이 극심하게 쌓이지만 어디 풀 곳이 없었다. 그 불만풀이가 바로 하회탈춤인데, ‘탈’을 쓰고 연희하면 양반 주인을 마구 욕할수 있고 그것이 용서됐다. 그건 영특하게도 민초들의 한을 달래고 풀어주는 이완제 구실을 했다. 이렇듯 법과 규범을 어기면 참살을 당하는 극히 엄격한 통제 사회에서도 욕망의 분출구를 열어둔 그런 풍습이 있었다.초기작부터 감독님의 영화 속에는 어떤 형태로든 차별받고 억압받는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그런 것이 우리 사회의 드러나지 않은 모습 아닐까? 영화라는 것이 그런 문제들을 조명하는 것이고 영화감독의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동양의 정서에도 맞다고 생각해서 그런 소재의 영화를 즐겨 만든다. 반드시 그런 영화만 가치있다는 것은 아니지만…. 짚신 신고 공을 찬 섬마을 아이들이 큰 축구대회에서 우승하는 것 같은 그런 이야기가 나를 흥분시킨다. 완벽한 사람들만 모여서는사회가 제대로 될 리 없다고 생각한다. 완벽한 영웅주의적 캐릭터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내가 관심 있게 보는 것은, 자기 삶의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다. <최후의 증인>에 나오는 ‘황바우’란 사람처럼 법 없이도 살 사람이 감옥에 가고, 그 사람을 무고로 감옥에 처넣고 그의 처와 재산을 갈취한 사회적 강자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이다. 그런 사회적 병리현상을 고발하는 것도 영화의 좋은 주제이자 목적이라고 본다. 약한 자의 편에 서서 박수를 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옛날처럼 체육대회 같은 데에서 관중이 당연히 약한 팀에 응원의 박수를 보냈듯이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된다.
작품 중에서 기억에 남는다든지 애정이 가는 작품을 꼽으라면?
<최후의 증인> 같이 죽었다 살아났거나, 잘 안 알려진 작품에 애정이 간다. <어느 부부> <해결사> <피막> <물레야 물레야> <뽕> 등이다.
<아리랑>은 남북한 동시개봉을 했는데.
시사회 때 평양에 갔었다. 북한에서 제일 크고 좋다는 국제영화관에서 엘리트당원으로 보이는 남녀 청장년들 앞에서 같이 간 양택조 씨의 변사공연으로 특별 시사회를 했다. 그들의 관람 태도는 신중했으며 시사가 끝난 후 박수와 인사치레는 정중했다. 후에 제작자가 서울 개봉에 맞춰 북한에서도 전국 상영을 했다는데 정식 극장보다는 관공서 상영관이나 가설극장 같은 것이 많아 아마도 스크린 수는 우리보다 훨씬 많게 상영했을 거라는 얘기를 들었다.30여 년 영화작업 동안 아쉬웠던 점과 자부심을 느꼈던 것이 있다면? 아쉬운 것이 거의 전부다. 내가 만들 시나리오나 타이틀을 적어놓은 것만 해도수십 작품인데 절반도 못한 것이 아쉽다. 20~30여 년 전에 만들었던 내 영화들을 지금 보면, 남들은 잘 만들었다고 해도, 나는 ‘왜 저렇게 촌스러운가? 세월을타지 않게 좀 더 세련되게 만들 수는 없었을까?’ 하는 항상 뭔가 모자란 것 같은 아쉬움이 든다. 그러나 내 영화들을 외국의 국제영화제에서나 회고전, 특별 시사회 등을 통해 봤을 때 한국적인 것을 표현한 것은 나름대로 잘했다는 자부심이 든다. 이건 애국심이나 민족주의 같은 거창한 이념 이전에 외국인에게 나의본질을 보여주는 것이어서 그들과의 문화적 소통이 잘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1985년 런던국제필름페스티벌 때 나의 <장남>과 <물레야 물레야>등을 본 영국영화평론가들이 ‘당신 영화에는 안방이 장판방이고 거기에 다리 꼬고 앉은 어른이 며느리의 밥상을 받아 식사하는 것이 인상적이고 한국문화를 알게 되어 좋았다’고 했다. 이것은 의례적인 칭찬이 아니라 영화를 통해 그 나라의 문화를 알고 싶은 지적 호기심을 영화가 채워줬다는 것이다. 나 역시 예전에 본 일본영화나 중국영화에서 양국의 참모습을 볼 때 그 감독들이 좋아져 일부러 영화제에가서 그들을 만난 적이 있다. 영화란 그렇게 문화를 선도하는 위대한 힘이 있고, 그걸 만드는 것을 업으로 삼은 나에게 한없는 긍지를 갖게 한다. 현
재 우리 영화에 대한 생각은?
다양해지고 풍성해졌다. 자본과 기술도 일정수준 이상으로 갖추어져 있다고 본다. 우리 때는 삶의 절실한 문제들을 영화로 만들었다면지금은 상상력을 극대화해 그야말로 영화 같은 영화를 만들어야 할 때가 아닌가? 난 <반지의 제왕>을 보고 깜짝 놀랐다. 완성도가 굉장히 높다. 판타지이지만 캐릭터나 비주얼적인 면을 보면 얼마나 치밀한 구성인가? 우리도얘기는 우리 것으로 하되 그 정도의 영상작품을 만들기 위해 도전해야 되지 않겠나? 요즘감독들은 그 정도의야심으로 독창력을 더욱발휘해 미래 지향적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 향후 계획은? 영화 시나리오 작업을 계속하고 있고, 해외 합작이나 작품 제작과 관련해서도 움직이고 있다. 오랜 감독 경험을 바탕으로, 그리고 내가생각하는 영화의 모습을 위해 전체 영화계에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힘을 보탤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