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나는 중학생이 되었다. 등교 때마다 학생지도부 선생과 선도부라는 체격 크고 멍청한 나치 친위대 같은 놈들의 무시무시한 감시의 눈총을 받으며 교문을 지나야 하는 것도 끔찍했지만, 더더욱 끔찍했던 것은 중학생이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는 행위는 무기정학에 처해지는 범죄 행위라는 것이었다. 세상에. 초등학교 시절 동네 극장을 모두 섭렵하고 저 멀리 퇴계로의 극동극장과 종로3가 파고다극장까지 진출했던 나는 더 이상 마음 놓고 영화를 보러 갈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고 말았다. 시꺼먼 교복의 가슴에는 내 이름표가 붙어 있었고, 학교 배지와 학년까지 내 모든 신상이 노출되어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극장 안엘 들어가면 나의 밤송이 같은 빡빡머리는 아무리 감추려 해도 감출 수 없는 주홍글씨였다. 게다가 학생지도부 선생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극장 화장실에 기생하는 동네 양아치들이었다. 내가 초등학생일 때는 미처 발견하지 못한 극장 안의 기생충이었는데, 아마도 그들의 기준에 초등학생은 면제 대상이었고, 중학생부터 삥을 뜯고, 때리기로 약속을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가? 보고 싶은 영화가 들어오면 나는 간다는 일념을 가진 중학생이었다.
집에서 좀 떨어진 서대문 로터리의 서대문극장에 오사원 감독의 한홍합작 쿵푸 영화 <비밀객>이 들어왔다. 수업이 끝난 직후. 교모와 교복 상의를 벗어 책가방 속에 집어넣는 어설픈 변장을 하고 나는 매표구 앞에 섰다. 매표구 안에서 소름이 돋는 말이 흘러나왔다. 매표구 아가씨 왈. “오늘 학생지도부 단속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아 제기랄” 왜 그런 말을 극장 입장권이 내 손에 쥐여진 다음에 하느냔 말이다. “오늘 학생지도부 단속이 있으니 표를 못 판다”라고 했다면 나는 깨끗이 단념하고 집으로 돌아갔을 것 아닌가. 점입가경. 극장 안에서 표를 받는 아저씨는 내가 내민 표를 받아 입장권을 떼어 입장권 함에 넣고는 단속이 뜨니 이층으로 올라가라고 은밀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다. 발걸음은 천근만근. 가슴은 두근두근. “걸리면 정학이구나. 엄마 얼굴을 어떻게 보나?” 이층으로 올라가니 그래도 다행인 것이 나와 비슷한 처지의 까까머리가 서넛 보였다. 동지들! 그들이 있다는 것을 위안 삼고 한숨을 돌리자 영화가 시작되었다. 당시 최고의 인기를 끌던 발차기의 마왕 왕도가 <정무문>에서 이소룡이 입었던 옷과 똑같은 하얀 옷을 입고 가슴에 유골함을 안고 걸어온다. 왕도가 다리를 건너려는데 그 앞을 악당이 막아선다. 그 순간. 학생지도부 선생이고, 정학이고 뭐고 저 멀리 날아가버린다. 왕도의 발차기가 악당을 날려버리고 슬슬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극장 아저씨가 숨을 헐떡이며 2층 객석으로 들어와 “여기는 위험하다! 3층으로 올라가라.” 헐레벌떡 3층으로 우르르 올라가는 나와 동지들. 그 와중에 내 또래의 단발머리 여학생을 발견한다. “열혈 여협이로군.” 3층에 자리를 잡고 몇 분이나 지났을까 아저씨가 다급하게 극장 문을 벌컥 열고 “왔다 왔어! 나를 따르라”고 소리쳤다. 겁에 질린 나는 아저씨를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 아저씨가 우리를 피신시킨 곳은 서대문극장의 영사실 바로 옆. VIP들만 출입하는 곳일 것으로 생각되는 대여섯 개의 푹신한 고급 좌석이 있는 곳이었다. 우리를 그곳에 몰아넣은 아저씨는 숨을 죽이고 조용히 하라며 극장 문을 바깥에서 철컥하고 자물쇠를 채우고 가버렸다. 지도부 선생들이 이곳까지 올라올 것에 대비한 온갖 탈출 경로를 생각하느라 영화의 내용은 하나도 기억 못한다. 영화가 끝나자 아저씨는 아직 선생들이 극장 로비에 있다며 우리를 극장 비상구로 인도해 무사히 탈출시켜주었다. 극장 밖 공기가 그렇게 시원한지 그때 처음 알았다. 하지만 나는 위기를 겪고도 다시는 극장에 가지 않겠다는 결심 따위는 절대 하지 않았으며 그로부터 10여년 후 서대문극장에서 또다시 어마어마한 시련을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