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조선 영화계에서 기인이라 할 만한 이를 꼽자면 이창근(李昌根)을 빠뜨릴 수 없을 것이다. 여러 사람이 세세하게 업무를 나누어 맡는 요즘과 달리 당시 영화계에서는 한 사람이 여러 분야의 일을 아울러 맡아 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 편이었으나, 그렇다 치더라도 이창근이 보여준 일인다역의 활동상은 놀라운 바가 있다. 제작•각본•감독•촬영•편집•현상 등, 사실상 연기를 제외한 영화 제작의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과정을 그는 직접 도맡아 해냈다. 게다가 촬영에 사용한 카메라까지 몇 년을 연구해 스스로 제작해냈으니, 내친김에 연기까지 시도해서 전무후무한 전방위 영화인의 기록을 세우게 되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오히려 들 정도다. 더구나 이창근은 그러한 모든 작업을 고향 평양에서 전적으로 진행했다. 예나 지금이나 서울의 문화적 흡인력이 강하기는 마찬가지였음을 생각해보면, 그의 독자적인 활동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같은 영화, 다른 기록
이창근이 1930년대에 만든 영화는 미완성작까지 더해 다섯 편으로 알려져 있는데, 대부분 관련 정보가 제대로 정리되어 있지 않은 편이다. 예컨대, 그가 서선(西鮮)키네마를 설립해 제1회 작품으로 처음 선보인 <돌아오는 영혼>은 1934년 4월에 단성사(團成社)에서 상영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 1932년 6월 신문 기사에는 서선키네마의 제1회 작품 <불멸의 영혼>이 7월 중순경에 공개될 예정이라는 내용이 보이기도 한다. 당시 기록을 좀 더 면밀하게 살피면 아마 밝혀지겠지만, 1932년에 평양에서 먼저 개봉(이창근은 제일관(第一館)에서 개봉했다고 생전에 술회한 바 있다)한 뒤 나중에 서울에서도 상영되었기에 위와 같은 두 가지 기록이 있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1939년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 <처의 면영(面影)>의 제작과 개봉 과정에서도 <돌아오는 영혼>과 유사한 현상이 보인다. 1938년 9월 신문 기사를 보면, 새로 창립된 동양영화촬영소에서 제1회 작품 <부부>를 한창 촬영하고 있다는 내용이 있다. 동양영화촬영소는, 1935년부터 조선에서도 발성영화 제작이 시작되면서 이창근이 새로운 영화 환경에 발맞추기 위해 서선키네마를 대신해 설립한 영화사다. 비록 제목이 <부부>로 되어 있기는 하나, 주연 배우로 이영(李影)과 김옥련(金玉蓮)이 출연했다는 점을 보면, <부부>는 제작 중 임시로 붙여진 <처의 면영>의 가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처의 면영> 주연 배우가 바로 이영, 그리고 김옥련과 이름이 유사한 김연옥(金鍊玉)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돌아오는 영혼>이 정식 개봉 이전 <불멸의 영혼>으로 소개되었던 점과 비슷한 경우일 것이다. <처의 면영>의 개봉에 대해 이창근은 1939년 6월 4일에 평양 동보(東寶)극장에서 처음 공개했다고 기억했는데, 1938년 신문 기사 내용으로 보나 기억의 구체성으로 보나 큰 오류는 없을 듯하다.
<처의 면영> 음반의 미스터리
그런데 이상한 점은 <처의 면영> 주제가 음반이 발매된 시기다. 1939년 6월에 개봉한 영화의 주제가 음반이 2년 가까이 지난 1941년 5월이 되어서야 나왔던 것이다. 두 달도 아닌 두 해의 시간차는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니, 영화주제가란 아무래도 영화 홍보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므로 개봉일 전후로 최대한 가까운 때에 발매되어야 효과를 제대로 기대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언뜻 보아 이해하기 어려운 영화 개봉과 영화주제가 음반 발매의 시간적 괴리를 합리적으로 설명하려면, 아무래도 <돌아오는 영혼>과 같은 상황에 대입해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즉, 1939년 평양에서 처음 개봉할 때에는 주제가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거나, 있었더라도 음반으로 제작할 상황이 아니었다가, 1941년 5월 전후에 서울에서 다시 개봉하면서 그 홍보를 위해 주제가 음반이 비로소 발매되었다고 추정해볼 수 있다.
음반 가사지로 만나는 영화
<처의 면영> 주제가는 영화와 제목이 같은 <처의 면영>과 <여인 행로> 두 곡이 같은 SP음반 앞뒷면에 수록되어 오케(Okeh)레코드에서 발매되었다. 전무후무한 일인다역 이창근의 기질은 주제가에서도 어김없이 발휘되어, 영화와 제목이 같은 주제가 <처의 면영> 가사는 그가 직접 지어 붙였다. 그리고 그 곡을 쓴 이는 이창근과 동향인 조계원(趙桂元), 즉 <선구자>의 작곡가 조두남(趙斗南)이었다. <처의 면영>은 아마도 음반으로 발매된 조두남의 유일한 대중가요 작품이기도 할 것이다. 대부분의 1930년대 영화와 마찬가지로 <처의 면영> 역시 필름이 남아 있지 않다. 필름뿐만 아니라 평양에서 제작•개봉되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관련 사진 한 장 제대로 공개된 것이 없다. 현재 <처의 면영> 장면을 볼 수 있는 시각 자료는 단 하나, 정말 뜻밖에도 주제가 음반과 함께 만들어진 노래 가사를 적은 가사지다. 어떤 배우가 어떤 장면을 연기한 모습인지는 확실하게 알 수 없으나, 그나마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아내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