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하늘의 블루스로 막 내린 인생극장

by.이준희(대중음악비평가) 2012-05-21조회 1,984

1966년 4월 3일, ‘1966년을 장식하는 뮤지컬 멜로드라마’임을 자부하는 영화 한 편이 개봉됐다. 음악영화에 어느 정도 이력이 붙은 최무룡과 태현실이 주연을 맡은 <밤하늘의 부르스>, 감독은 노필이었다. 광고 문구는 거창했으나, 사실 음악영화로서 만듦새가 썩 뛰어난 작품이라 하기는 어려웠다. 개봉 직후 신문에 실린 기사에서도 “이야기가 지루한데다 따분한 대목에서나 노래와 춤이 ‘커버’해주긴 하나, 뭐 ‘뮤지컬’이라고 하기보다 ‘스토리’ 위주의 노래 ‘앨범’ 정도”라고 간단히 정리했는데, 실로 군더더기 없이 정확한 평이었다.

풍성한 볼거리로 눈길을 사로잡다

통속 그 자체인 밋밋한 이야기를 이끌어가려면 노래와 춤도 그냥 예사로운 수준이어서는 안 될 터. 이에 관해서도 영화 광고는 사뭇 묘한 표현을 써가며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톱 싱어들의 향연’이야 뮤지컬을 자부하는 영화로서 그렇다 칠 수 있지만, ‘육체의 제전’은 아무래도 의도적으로 수위를 높인 표현이었다. <밤하늘의 부르스>를 장식하는 톱 싱어들의 향연은 확실히 보통 이상이다. ‘노래하는 무비스타’로 당대를 풍미한 최무룡을 비롯해, 이른바 ‘학사가수’ 프로젝트 그룹 ‘포 클로버스’ 멤버이던 이한필, 즉 위키리와 유주용, 방송국 전속 가수로 1960년대 중반 많은 인기를 누렸던 조애희, 파격적인 몸동작으로 최초의 ‘댄스 가수’로까지 근래 평가되기도 하는 이금희,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 ‘매혹의 저음’으로 1960년대 전반을 평정한 남일해, ‘삼천만의 꾀꼬리’ 박재란 등이 연이어 등장한다. 이야기 전개와 모두 필연적인 관련이 있다고는 할 수 없는 가수들의 공연 장면을 다소 과도하게 배치한 것도 그렇기는 하지만, 맨살 충만한 비키니 차림으로 화끈하게 춤을 추는 댄서들의 육체의 제전은 관객들의 지루함과 따분함을 덜어주기 위한 매우 적극적인 배려라 할 수 있다. 10년 전 개봉한 영화 <자유부인>에서 무려 3분이 넘게 ‘떨기 춤’의 진수를 보여주었던 것을 상기시키는 대목이다. 광고에서도 특히 강조한 이 육체의 제전 주역들은 워커힐 댄싱팀인데, 거기서 힌트를 얻은 것이었는지, <밤하늘의 블루스> 개봉 뒤 여덟 달이 지난 1966년 연말에는 아예 <워커힐에서 만납시다>라는 영화가 개봉하게 된다. 연출을 맡은 이는 바로 <자유부인>의 감독이던 한형모였다.

감독 노필의 갑작스러운 자살

풍성한 볼거리로 대중의 눈길을 끈 <밤하늘의 부르스>는 개봉관 국도(國都)극장을 거쳐 5월에는 종로4가 한일(韓一)극장, 6월에는 만리동 봉래(蓬萊)극장, 7월에는 노고산동 신영(新映)극장을 지나 7월 말 금호동 금호(金湖)극장까지 돌며 상영되었다. 그 사이 대략 10만 명의 관객이 들었다고 하니, 흥행 성적이 그리 나쁜 편은 아니었던 셈이다.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 순조로운 듯했던 <밤하늘의 부르스>는 바로 그 순간 예기치 못했던 비극으로 곪을 대로 곪아 있던 영화계 내부의 문제를 세상에 드러내고 말았다. 1966년 7월 29일, 감독 노필의 갑작스러운 자살 소식이 충무로에 전해졌던 것이다. <꿈은 사라지고>(1959), <심야의 블루스>(1960), <검은 상처의 블루스>(1964) 등 특히 주제가가 인상적인 작품들을 여러 편 성공시켜 당대 음악영화의 제1인자로까지 불렸던 노필이 인적 없는 새벽 공원에서 목을 매달아 자살한 이유는 거액의 빚 때문이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을 때 그가 가지고 있었던 돈은 장례 절차에 필요할 것을 예상해 마지막으로 시계를 팔아 마련한 3000원 남짓. 졸지에 가장을 잃은 그의 집에는 현금이 달랑 80원 있을 뿐이었다고 한다. 반면 그가 영화를 만들어오면서 진 빚은 무려 200만원 정도였다. 빚 독촉에 시달려 집에도 편히 들어갈 수 없었던 그에게 아무래도 탈출구는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밤하늘에 바치는 조가

한국영화의 전성기라고 하는 1960년대의 한가운데에서 일어난 노필 감독의 자살 사건은, 전성기의 이면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던 영화계의 부조리를 조금이나마 대중이 인식하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1962년에 영화법이 제정되면서 불가피하게 관행이 된 ‘대명(貸名) 제작’의 부작용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던 것이다. 노필이 진 빚의 상당 부분도 영화를 찍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법적으로 등록된 영화 제작업자의 명의를 빌리는 데 끌어다 쓴 돈이었다. 뜻밖에 일어난 사건이 야기한 사회적 충격이 컸기 때문이었을까. 노필이 세상을 떠난 뒤 몇 달이 지나, 그의 삶을 소재로 한 노래 <막 내린 인생극장>이 여러 작품을 함께했던 콤비 최무룡의 노래로 발표되었다. <막 내린 인생극장>을 듣다보면, 노필의 마지막 작품 <밤하늘의 부르스> 주제가의 멜로디를 짧게 차용한 대목이 있다. 가사만 보아도 그렇기는 하지만, 실로 밤하늘의 블루스로 막 내린 인생극장의 주인공 노필을 위한 안타까운 조가(弔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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