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무룡 감독의 <나운규 일생>(1966)

by.이순진(영화사 연구자) 2012-03-12조회 1,547
나운규 일생

체계를 제대로 갖춘 한국영화사를 서술하는 것은 현장 영화인들의 ‘숙원’이었다. 나운규 서거 20주기를 맞은 1957년에 영화계의 총의를 모아 이루어진 <아리랑>(김소동)의 재영화화 작업이 그 포문을 열었다. 나운규라는 영화인을 통해 ‘민족’영화사의 기원을 정립하고자 하는 시도는 곧 본격적인 영화사 서술로 이어졌다. 1959년과 1963년 두 차례에 걸친 영화사 편찬 작업이 불발로 그친 이후에, 한국영화인협회는 1969년, 마침내 <한국영화전사>를 세상에 내놓았다.

영화인들은 왜 스스로 역사가가 되고자 했나

한국영화인협회의 의뢰를 받아 <한국영화전사>를 집필한 이영일이 이 책의 후기에서 스스로를 ‘편저자’로 지칭하고 있음은 단지 겸양이 아니다. <한국영화전사>는 협회가 기획한 한국영화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이었을 뿐 아니라, 협회에 소속된 많은 영화인의 구술 증언을 그 뼈대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영일은 스스로 술회한 것처럼 “영화계의 숙원을 구현한 기념비”를 세우는 일을 떠맡은 대리인이었던 것이다.

영화사 연구가 제도화된 학문 분과로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이었음을 감안하더라도 현장 영화인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역사를 세우는 일에 그토록 헌신해왔다는 사실은 이채롭다. 우리는 역사를 서술하는 일이, 직업적 전문성으로 무장한 역사가의 전유물일 수밖에 없는 시대에 살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그들은 어째서, 역사를 역사가의 손에 놓아두지 않고 그들 스스로 역사가가 되고자 했던 것일까?

물론 <한국영화전사> 그 자체가 그들이 직접 써야만 했던 ‘역사’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민족주의’와 ‘리얼리즘’의 기치 아래 일제강점기의 영화 유산은 남한 영화의 전사(前史)로 자리매김했다. 그런 후에야 비로소 남한의 영화인들은 자신들의 역사적 정당성과 자아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한국영화전사>를 저류하는 발전사관과 냉전적 사고방식은 1990년대 이후의 연구자들에게 극복의 대상이 되었을지언정, 이 책이 자리매김해놓은 한국영화사의 빛나는 걸작과 뛰어난 작가들은 여전히 그 명성을 잃지 않았다. 그 오래 지속되어온 영향력에 의심의 시선을 던지는 순간, 맞닥뜨려야 하는 본질적 질문은 앞서 던졌던 바로 그것, 즉 왜 현장의 영화인들은 그들 스스로 역사가가 되고자 했는지일 것이다. <나운규 일생>(최무룡, 1966)을 볼 때 또한 마찬가지다. 이 작품은 말하자면 현장의 영화인들이 영화로 쓴 영화사며, 특히 나운규를 중심으로 일제강점기를 구성하고 있는 <한국영화전사>의 영화 판본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인들의 역사 쓰기 욕망과 나운규의 일대기

부산의 조선키네마주식회사에서부터 경성촬영소에 이르기까지, 또 <운영전>(윤백남, 1924) 에서 <오몽녀>(나운규, 1937)에 이르기까지 당시 영화계의 상황과 영화 제작 현장이 구체적으로 형상화되어 있는 것이 흥미롭기는 해도, 현재의 시점에서 보자면 영화가 그려낸 그 시절의 모습이 흡족할 수는 없다. 후대의 여러 ‘전문적인’ 역사가들에 의해 당시 영화계와 관련한 많은 새로운 사실(史實)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 속 사건의 사실관계를 따지는 것, 예컨대 <아리랑> 상영 당시 실제로 임석 경관의 제재가 있었는지, 나운규가 일제 경찰의 고문을 받은 적이 있는지를 묻는 것은 이 영화의 가치를 제대로 심문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1957년의 <아리랑>에서 <한국영화전사>까지를 관통하면서 십수 년간 지속되어온 현장 영화인들의 역사 쓰기에 대한 열정과 욕망이 나운규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를 통해 어떻게 형상화되고 있는지를 묻는 편이 더 현명한 일이다.

영화의 전반부는 독립운동가로서 나운규의 형상이, 후반부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 몸을 불사르는 예술가로서 나운규의 형상이 압도적이다. 이는 <한국영화전사>가 그려낸바, 민족운동의 지사이자 강렬한 예술의지에 불타는 예술가로서의 영화작가 형상에 정확히 부합한다. 굳건한 민족의식과 예술의지를 가진 영화작가야말로 일제강점기 이래 한국의 영화사를 지탱해온 주축이었다는 것, 그것이 <한국영화전사>와 <나운규 일생>이 공히 주장하는 바다.

인물과 영화 캐릭터 사이의 위태로운 줄타기

하지만 민족운동가와 예술지상주의자 사이의 간격은 넓고도 깊다. <한국영화전사>에서도 영화를 계몽적 도구로 바라보는 태도와 예술지상주의적인 태도 사이를 위태롭게 줄타기하는 정황이 종종 목격되기는 하지만, 둘 사이의 모순은 영화 <나운규 일생>에서 훨씬 더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독립운동가 박용운의 유지를 받들어 “잠든 민족의 혼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수단과 방법”으로 영화를 선택했던 나운규가 자학과 자기연민에 빠져 기생의 치마폭에 파묻혀 살 때, 또 그러던 그가 다시 몸을 일으켜 <오몽녀>의 촬영 현장에서 마지막 레디고를 부르고 쓰러질 때, 관객은 영화 속 나운규가 보여준 급격한 변화의 내적 동기가 무엇인지를 쉽게 찾을 수 없다.

그런데 나운규의 극적인 변화가 영화 속 인물의 형상화를 통해 설득력을 확보하지 못하는 것은 영화감독의 역량이 부족한 탓이 아니다. 차라리 민족영화의 시원(始原)이자 한국영화인들의 지향점으로 구성되어야 했던 역사적 인물 나운규의 무게가 영화 속 캐릭터의 일관성과 설득력을 앗아갔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한국영화전사>가 이영일의 것만은 아닌 것처럼 <나운규 일생> 또한 영화감독 최무룡의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나운규 일생>은 ‘걸작의 재발견’이라는 타이틀에 걸맞은 영화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영화로 쓴 영화사 <나운규 일생>이야말로, 반세기 가까운 동안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영화사 서술의 특정한 관점을 재고하는 자리에서라면 가장 먼저 기억해야 할 작품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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