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발탄 취급을 받는 사람들

by.박정범(영화감독) 2012-01-04조회 1,318
오발탄

비가 오는 한남동 초입의 정류장에는 사람이 거의 없다. 언제나 혼자 기다리거나 많으면 두세 명이다. 며칠 전에도 정류장 부스 안에는 나, 그리고 길가에 나가 서 있는 40대 중반 즈음의 남자 한 명만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 앞쪽에 있는 왜소한 남자는 몸에 비해 큰 짙은 갈색 코듀로이 바지와 빛바랜 가죽점퍼를 입고 있었다. 나는 그의 손에 들린 우산을 보았다. 회색체크 무늬가 들어간, 2단 수동형의 낡은 우산. 먼지는 털어냈으나 시간은 멈춰버려, 그대로 1980년대 공단의 남루한 직공이 되어도 좋을 뒤태의 남자. 시간을 거스른 듯한 그의 모습을 나는 망연히 보고 있었다. 사람을 관찰하다보면 그들의 일상을 눈에 그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시선을 쉽사리 뗄 수 없는 탓이기도 하다. 그때 나는 내 인생의 영화로 <오발탄>을 쓰기로 했다. 영화에 대한 어떤 관심도 없을 때 교양과목 시간에 보았던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 그 후로 내 인생의 영화라 할 수 있는 많은 명작을 만났지만 치기 어리고 무지했던 그때의 나를 힘들게 했던 영화는 역시 <오발탄>이 아니었나 싶다. <오발탄>의 철호가 느끼는 답답한 심경이 내 시선을 붙잡았던 것이다.

사랑니 하나 뽑을 여유도 없는 박봉의 가장인 철호의 모습은 전후시대의 전유물만은 아닐 것이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여전히 힘에 겨운,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그렇다고 현실에서 도망칠 수도 없는 무기력한 가장은 늘 존재한다. 아무리 노력해도 궁색한 삶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공포와 내려놓을 수 없는 책임감에 쓰러지지도 못하는 중년의 사내들.

쓸모없는 오발탄 취급을 받는 사내들뿐이겠는가. 갈 수 없는 고향으로 “가자”고 외쳐대며 정신을 놓은 노모와 영양실조에 걸린 만삭의 아내,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젊은 청춘(동생 영호), 양공주가 되어 몸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는 여동생 명숙 등 <오발탄>의 모든 인물은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씁쓸한 사실이긴 하지만 외면해서는 안 될 현실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오발탄>은 우리가 다시 한 번 상기해야 할 대한민국의 현실을 보여주는 영화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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