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잡지]전 편집장, 편집위원의 영화잡지 제작 시절 회고담 (씨네21) 영구의 추억

by.허문영(영화평론가) 2011-11-25조회 2,288
거의 완성된 것처럼 보였던 심형래의 성공신화가 허위의 도가니로 판명되는 최근의 과정을 지켜보며 해묵은 사건 하나를 떠올렸다.

1999년 7월 5일 아침, 서울 공덕동에 있는 한겨레신문사 사옥 앞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영구아트무비의 직원으로 구성된 50여 명의 시위대는 손팻말까지 준비해 <씨네21>을 규탄하는 요란한 구호를 외쳤다. 사태의 발단은 그 주에 실린 기사에 있었다. 이후 <씨네21> 편집장을 거쳐 지금은 부산국제영화제 마켓실장으로 일하는 남동철 기자가 쓴 이 기사는 심형래 감독의 <용가리>가 30억 원의 가격으로 해외에 수출되었다는 영구아트무비의 주장에 의혹을 제기했다.

당시로선 이런 의혹 제기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한국 사회가 1997년 말의 외환위기가 몰고 온 충격에서 가까스로 깨어나기 시작한 시점이었고, 벤처 캐피털이 한국 경제의 구세주로 떠받들어지고 있었다. <용가리>의 엄청난 수출 성과는 의심 없이 사실로 받아들여졌고, 심형래는 벤처 캐피털 시대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김대중 정부는 그를 신지식인으로 칭하며 방송 광고까지 제작했다. “못하니까 안 하는 게 아니라, 안 하니까 못하는 겁니다”라는 심형래의 모토는 당대의 정언명령이 되었다. 하지만 당시 충무로에서 떠돌던 이야기는 좀 달랐다. 영구아트무비가 맺은 계약은 법적 구속력이 없는 양해각서(MOU)에 불과하며 30억 원이라는 액수는 영화가 완성된 후 정식 계약 때 논의될 수 있는 수출가의 상한선이라는 것이었다. 즉 수출은 성사되지 않았으며 이 수출가는 영구아트무비 쪽의 희망사항이라는 것이었다.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한국 사회 전체가 영구아트무비에 완전히 속고 있는 셈이었다.

당시 <씨네21> 팀장으로 일하고 있던 나는 수석기자 김영진(현 명지대 교수)과 꽤 길게 논의했다. 우리의 결론은 <용가리> 개봉일(7월17일) 전에 이를 기사화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취재 및 기사 작성은 남동철에게 떨어졌다. 남동철은 모든 분야에서 하루 이틀 안에 일급의 글을 뽑아내 ‘기사 자판기’로 불리는 전설의 기자였다. 그의 취재 결과 충무로의 소문은 대부분 사실로 확인되었다. 문제의 기사가 실린 <씨네21>이 발간되었고, 분노한 영구아트무비 직원들이 몰려왔다.

이날의 시위대는 “남동철은 사과하라”고 구호를 외쳤고, 인근 주민 한 사람은 <씨네21>로 전화를 걸어 “시끄러워 못 참겠다. 남동철이 누구냐. 빨리 나와서 사과해라”라며 화를 내기도 했다. 이 시위는 조선희 편집장과 남동철이 영구아트무비의 비교적 합리적인 간부 한 사람을 설득함으로써 마무리되긴 했지만, <씨네21>이 겪은 최대의 필화사건 중의 하나로 남았다. 이 기사가 심형래 감독이 자신에 대해 지닌 오해, 그리고 한국 사회가 그에 대해 지니고 있던 오해를 해소하는 데 크게 기여하지 못했다는 게 아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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