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승배기 삼거리 오른쪽에 위치한 강남극장에 장편 만화영화 <번개 아톰>이 들어왔다. 하지만 초등학교 2학년인 나를 극장에 데려갈 사람이 없었다. 방학 때마다 극장에 걸리는 방학특선 만화영화를 보여주고 자장면을 사주던 큰삼촌은 군대에 가버렸고, 작은삼촌은 사고로 병원에 누워 있었다. 어머니에게 징글징글하게 졸라댄 덕분에 주인집의 초등학교 5학년, 3학년 형제와 이웃집의 중학교 1학년 형과 같이 영화를 보러 가게 되었다.
영화를 보러 가게 된다는 기쁨에 앞서 시작부터 뭔가 좀 기분이 안 좋았다. 어머니께서 영화를 보고 극장 안에서 뭐라도 사 먹으라고 준 돈을 이웃집 중학생이 자기가 모두 관리하겠다며 달라는 것이었다. 내 머릿속에서 빨간불이 켜지며 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웃집 중학생은 안 주면 데려가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평소 주인집 형들과 그 중학생을 좋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중학생이 초등학생들과 어울려 노는 것도 바보 같았고, 근처의 강남초등학교 앞 문방구에서 자잘한 물건을 훔치고 나에게 자랑하는 꼴이 웃겼고, 학교에서 내준 숙제를 어떻게 하면 선생을 속여서 편하게 하는지를 몸소 보여주던 이력이 있는 형들이어서 별로 신뢰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의 불안은 극장 앞에서 현실로 드러났다. 중학생은 당시 말로 “쌔벼 들어간다”를 나에게 강요했다. 어머니가 준 돈으로 당당하게 극장에 들어가야 하는데, 돈도 안 내고 매표구 밑으로 고개를 숙이고 살금살금 기어서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그들이 먼저 어른들 틈에 끼여 들어갔고, 나만 남았다. 그들은 극장 안에서 어서 들어오라고 손짓을 했다. 겁이 났지만, 영화를 보고 싶었다. 어찌어찌하여 다행히 걸리지 않고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스크린에서는 번개 아톰이 손바닥에서 나오는 레이저 빔을 발사하고 있었는데, 중학생과 주인집 초등학생 형들이 따라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영화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영화를 한 10분 정도나 보았을까? 헐레벌떡 극장 안으로 들어온 그 중학생은 빨리 도망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정말 짜증이 났다. 나 좀 내버려두라고! 극장 안의 깡패들에게 걸려 돈을 다 빼앗겼다는 것이었다. 영화에 정신이 팔린 나를 그들은 잡아끌고 극장 밖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뒤에서 누가 따라오는지 뒤돌아보지도 못하고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선 장승배기의 민둥산을 보고 도망쳤다.
환청인지, 누군가 거기 서라고 고함을 질렀고, 나는 죽어라 달렸다. 가파른 언덕을 기어서 올라가는데 하늘에서 눈이 한 송이 두 송이 내렸다. 온몸에 식은땀을 줄줄 흘리면서 민둥산을 다 기어올라간 나는 극장에서 도망친 후 처음으로 뒤를 돌아다보았다. 장승배기 삼거리에 눈이 내리고 있었고, 헐떡거리며 같이 도망친 중학생과 주인집 형들은 낄낄거리며 살았다고 좋아들 하고 있었다. 깡패들에게 걸려서 매를 안 맞은 것이 다행이란 말이었는데, 나는 그들이 의심스러웠다. 진짜 깡패들에게 걸리기나 한 건가? 내가 속은 것이 아닌가? 번개아톰은 저 멀리 날아갔고, 그때 나는 앞으로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극장 안에서 기생하는 수많은 양아치들과 학교 지도부 선생들과 영화를 볼 때마다 이런 숨바꼭질을 할 운명이란 것을 전혀 모르고 눈 내리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