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동네 극장의 추억 ② 흔적조차 사라진 미아리극장

by.정성일(영화감독, 영화평론가) 2011-07-12조회 1,712

내가 처음으로 혼자 영화를 보러 다니기 시작한 영화관은 미아리극장이었다. 정확한 주소를 알지는 못하지만 지금의 위치를 설명하자면 지하철 4호선을 타고 길음역에서 내려 7번 출구로 나온 다음 그 길을 따라 50m 정도 올라간 언덕길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이 극장을 찾아가려는 헛된 수고는 하지 마시기를. 슬프게도 이미 세상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몇 차례 재개발 끝에 이제는 그 흔적조차 없어졌다.

내가 처음 이 극장을 찾은 것은 (아직은 그렇게 부르던) 국민학교 4학년에 올라가던 해의 3월이었다. 1969년의 일이다. 내가 처음 낸 입장료는 65원이었다. 그날 내가 본 영화는 이미 개봉한 지 한참 지난 다음 여러 극장을 돌고 돌아 수없이 ‘비가 내리는’ (그때는 프린트에 영사기 사이로 끼어든 모래먼지로 생긴 스크래치가 있을 때 비가 내린다고 표현했다) 홍콩영화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였다. 이 영화를 부천 판타스틱영화제에서 상영할 때는 한자 제목을 그대로 읽은 <독비도(獨臂刀)>라는 제목으로 상영되었다. 하지만 나는 역시 ‘원래의 번역’ 제목을 들을 때 심장이 두근거린다.

물론 미아리극장이 내가 간 첫 번째 영화관은 아니다. 부모님은 나를 데리고 종종 극장에 갔다. 나는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단 한 번도 칭얼대지 않는다는 이유로 동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 손으로 표를 사서 내 마음에 드는 자리에 앉아 영화를 본다는 것은 (어린 시절의 나에게) 완전히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미아리극장은 변두리에서 재개봉한 다음 한 번 더 개봉하는 삼봉관(三封館)이었다. 그러고 나면 두 편을 한 편 값에 상영하는 동시상영관으로 그 영화는 옮겨갔다. 이 극장은 커다란 1층과 꽤 넓은 2층으로 이루어진 그랜드형 영화관이었다. 입구에 들어서면 먼저 2층이 보였고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1층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나는 2층에서 영화를 본 기억이 없다. 나무로 등받이를 만든 의자는 대부분 커버가 벗겨져서 좌석 번호를 알아볼 수 없었고 극장은 항상 거의 비어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제자리에서 영화를 보지 않았다. 나는 그해 여름방학을 내내 거기서 보냈다. 극장은 관객을 위해 커다란 선풍기를 스크린 양옆에 세워놓고 내내 돌려댔다. 하지만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거기서 추석 영화를 보았고, 크리스마스 영화를 보았다.

겨울은 좀 힘들었다. 왜냐하면 극장 뒤편에 몇 개의 의자를 치우고 가져다놓은 난로 서너 개가 전부였기 때문이다. 난로 주변은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차림새를 하고 상영 내내 자기들끼리 둘러서서 담배를 피우며 낄낄대는 사내들의 차지였다. 나는 근처에 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꼼짝 않고 앉아서 영화를 봤기 때문에 겨울에는 몹시 추웠다. 발이 너무 시려서 신발을 벗고 손으로 두 발을 번갈아 비벼대며 영화를 보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미아리극장을 더 이상 가지 않게 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이듬해 늦봄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상영관 문 옆에서 나보다 서너 살은 많아 보이는 소년이 은밀하고도 위협적으로 나를 불렀다. 그는 야비한 웃음을 흘리면서 가진 돈을 모두 내놓으라고 말했다. 나는 거절했고 그 자리에서 무자비하게 맞았다. 나는 어머니가 점심 사 먹으라고 준 돈을 아껴 모은 용돈을 모두 빼앗겼다. 아픈 것보다 서러웠다. 화장실에서 울면서 흙 묻은 자리를 모두 닦았고 코피를 지웠다. 우리 집에서 아무도 내가 영화를 혼자 보러 다닌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다. 하여튼 나는 그날 이후로 다시는 미아리극장에 가지 않았다. 그 대신 좀 더 비싼 입장료를 지불하면서 대지극장과 명륜극장으로 옮겼다. 내가 돈을 내고 혼자 개봉관에 간 것은 그로부터 2년 후의 일이다. 하지만 그건 또 다른 지면에서 해야 할 이야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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