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컬러TV가 보급되기 시작했다. 내가 살던 아파트 단지에도 컬러TV의 광풍은 어김없이 일었는데, 언제나 남들과의 경쟁에서 뒤처지는 것을 큰 치욕으로 여기셨던 아버지는 컬러TV에 VTR이라는 새로운 기계까지 얹어 보란 듯이 풀AV시스템을 장만하셨다. 언제나 원하는 때에 영화를 볼 수 있다는, 믿을 수 없는 신기술의 상징-VTR이라는 기계에는 비디오테이프 몇 개가 따라왔는데, 기억을 더듬어보면 구성은 다음과 같았다: 한자여서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 B급 홍콩 쿵푸영화 한 편, 영어여서 역시 제목을 기억할 수 없는 B급 할리우드 공포 영화 한 편, 그리고…, <삼포 가는 길>이었다.
쿵푸영화와 공포영화는 온 가족이 함께 시사도 하고, 누가 놀러오면 VTR이라는 신문물을 자랑도 할 겸 틀어주곤 했는데, 유독 <삼포 가는 길>이라는 영화만큼은 볼 기회가 없었다. ‘연소자 관람불가’였기 때문이다. 구구단도 외우지 못하는 초등학생 코흘리개였지만, ‘연소자 관람불가’라는 강렬한 문구를 달고 있는 붉은빛의 <삼포 가는 길> 테이프는 무궁한 호기심을 자극하고 또 자극했다. 하지만 가정이란 곳의 보안이 생각보다 허술하다는 것을, 머지않아 나는 알아버리고야 말았다. 집이 비는 타이밍과 장식장 잠금장치 푸는 방법을 구구단보다 빨리 알아버린 나는, 오래지 않아 <삼포 가는 길>에 용감하게 오를 수가 있었고, 2차 성징기는커녕 아직은 항문기 쪽에 훨씬 가까웠을 꼬맹이는, 그렇게 ‘연소자 관람 불가’ 세계의 문을 스스로 열어젖혔다.
영화를 보고 난 후 한참을 두고두고, 거짓말처럼 눈앞에 저절로 장면들이 영사가 됐더랬다. 모닥불 너머 아른거리던 백화의 창백한 속살이, 그 위로 무너져 내리던 노영달의 거친 숨이.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처음으로 본 여자의 속살이었으니, 맞다. 오래가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아니다. 야하거나 자극적이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가엽고 외롭고 먹먹하다’라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받은 느낌 때문이었다. 눈이 계속 내리던, 끝없이 눈이 쌓였던, 그 눈을 하염없이 걷던, 세 사람의 쓸쓸한 이미지가, 그 생소한 정서를 더 꼼꼼하고 구체적으로 기억하도록 도왔다. 그리고 아직도 구구단을 외우지 못하고 여전히 항문기 쪽에 더 가까웠던 꼬맹이의 가슴에는, 어른들에게나 생기는, 미세한 생채기가 났다.
그 후 사춘기가 되고, 성인이 되고, 감독이 되어… 수차례 <삼포가는 길>을 볼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내가 무엇이 되어 있건, 이 영화 앞에만 서면 초등학교 꼬맹이 때의 기억부터 났다. 그렇게 오래된 일임에도 놀라울 정도로 모든 장면이 속속 기억나고, 최초의 감흥은 고스란히 올라왔다. 어쩌면 ‘영화’라는 것을 본격적으로 인식했던 최초의 순간이 바로 그때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때 ‘영화를 본다’라는 개념과, ‘영화를 기억하고 기념한다’라는 개념을 알게 되었으니까. 그러니까 이만희 감독님의 마침표였던 이 영화가 내게는 영화라는 개념의 시작점이 된 셈이다. 내 머릿속에 또박또박, 강렬하고도 명확하게, 그렇게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