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식 감독의 <왜?>(1974) 자의식 과잉이 만들어낸 영화적인 영화

by.오승욱(영화감독) 2011-05-18조회 2,978

이전 해에 경관 폭행 사건으로 구류를 살았던 배우 박노식은 구치소 안에서 많은 생각을 했다고 한다. “인간 사표를 쓰고 인간답지 않은 벌레 같은 삶을 사는 것 같다는 생각이 하루에도 수백 번 드는 것이었다”(박노식 자서전, <뻥까오리 백작>에서 인용). 꼬리에 꼬리를 물던 생각들이 엉뚱한 곳으로 발전했는데 그것은 “나도 내 영화를 만들고 싶다”였다. 박노식은 다음 해에 자신이 시나리오를 쓰고 감독, 주연, 제작을 한 <인간사표를 써라>로 감독으로 데뷔한다.

무국적, 무경계, 과잉의 영화

그의 첫 번째 영화 <인간사표를 써라>는 여러 가지 면에서 한국에서는 처음 보는 기괴한 액션영화였다. 영화가 시작되면 고대 원시인 같은 복장의 사내들과 일본군, 일본인, 중국인, 그리고 조선인들이 등장해 이상한 제의를 한다. 굳이 따지자면 1930년대의 만주 어느 곳인 것 같지만, 다음 신(scean)의 배경은 1970년대의 서울이다. 만주에서 사랑하는 의형제 김희라를 악당 허장강의 음모로 잃은 박노식은 복수를 결심하고 허장강을 찾아 1970년 서울의 무교동 어느 빌딩으로 온 것이다. 김희라의 아내를 찾아가 그의 죽음을 전하려고 하는데 김희라의 아름다운 아내 김지미는 장님이었고, 그녀는 박노식을 자신의 남편 김희라가 돌아온 것이라 오해하고 박노식을 껴안고 오열을 터뜨린다. 사나이 박노식, 의형제의 아내 김지미를 품에 안고 차마 김희라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못하고 김희라 행세를 하며 영화는 진행된다. 무국적, 시대 무시. 훼손된 신체를 복원하려는 과잉된 열망으로 충만한 비극적인 라스트. 당시에는 대단한 볼거리라 여겨질 만한 카 체이스. 배우 박노식이 입고 등장하는 17세기 유럽 귀족들이 입었을 것 같은 이상한 취향의 의상들. 이 모든 과잉으로 범벅된 영화가 <인간사표를 써라>였고, 영화는 흥행에 성공했다.

조악함이 사라진 영화적인 영화

그 후 박노식은 해마다 한 편씩 자신이 감독한 작품을 발표한다. <인간 사표를 써라>를 보고 그의 그로테스크한 액션영화에 관심을 가진 이후 <쟉크를 채워라>(1972),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1976)를 보았다. 갈등을 낳는 분리된 자아들과 짝패. 신체훼손을 복원하려는 과대망상이 박노식 감독의 영화에서 줄기차게 이야기되는 주제다. 흥미가 있었지만, 영화의 만듦새는 너무나 조악해 영상자료원의 창고에 잠들어 있는 그의 영화를 복원하자고 나서서 주장하기가 좀 눈치가 보였다. “또 박노식이냐? 이제 재미없다”는 무언의 압력도 있어서 그의 영화들을 복원하는 것에 대해 신경을 끄고 있었는데, 박노식 감독의 영화 <폭력은 없다> <방범대원 용팔이> <집행유예> <왜?> <하얀수염> <광녀> <육군사관학교> 총 7편이 복원되었고, 먼저 영화를 본 영상자료원 직원들이 이구동성으로 영화가 재미있다는 흥분된 소식까지 전해왔다.

연기에 대한 욕심 때문에 선배 장동휘와 술집에서 싸움까지 했던 박노식이니 연출에 대한 욕심도 남달랐을 것이다. 그가 감독한 영화를 보면 당시 그가 보고 공부했던 영화에 대한 지식이 총망라되어 있다. 하지만 너무나 조악하다. <쟉크를 채워라>를 보면 전 신(scean)에서 영화와 관계된 대사가 나오면 다음 신에서 박노식이 침대에 누워 일본 영화 잡지 <스크린>을 보고 있다. 마치 끝말잇기 말장난 같은 유아적인 신 전환 방법이어서 실소를 머금게 하는 대목이다. 하지만 이번에 복원된 영화들에서는 그런 조악함이 많이 사라진 연출을 보여준다. <왜?>의 한 신을 보자. 악당이 박노식에게 총을 겨눈다. 장면이 바뀌면 박노식이 아니라 박노식의 똘만이 장혁이 손을 번쩍 든다. 박노식과 똑같은 위기상황에 빠진 장혁을 보여주는 것이다. 1974년에 만들어진 <왜?>에 이르러서는 좀 더 영화적인 연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액션영화와 B급 영화의 조우

영화 <왜?>는 무척 재미있는 영화다. 과거 팔도 사나이 시리즈에서 만들어진 캐릭터. 전라도 사나이 의리의 용팔이 자신의 똘만이 용칠이 장혁을 데리고 일본에 오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용팔의 사촌 여동생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에 의해 납치되고 용팔의 가방(사실 악당들에 의해 바꿔치기된)이 용팔이와 용칠이 앞에서 폭파된다. 폭소를 자아내는 타이틀 시퀀스가 지나고, 일본 야쿠자들이 좌우로 도열한 가운데 콧수염을 기른 한 사내가 서 있다. 앗, 저 사내는! 또 다른 박노식이 서 있다. 일인이역. 일본 야쿠자 두목 박노식이다. 박노식의 첫 번째 영화부터 줄기차게 나오는 파마를 한 곱슬머리에 콧수염을 기른 전형적인 하드보일드 캐릭터 박노식이다. 라스트. 전라도 용팔이와 하드보일드 캐릭터 악당 박노식이 영화 속에서 처음으로 대면하자마자 두 주인공은 박장대소한다. 두 명의 박노식과 주변인물도 모두 박장대소한다. 참 유쾌한 장면이다. 인간 박노식의 분열된 자아. 인정 많고 의리에 살고 죽는, 구수한 사투리의 전라도 사나이 박노식과 하드보일드 영화의 심각한 악당 박노식이 서로가 서로를 보고 비웃는 것이다. 스즈키 세이준의 기괴한 B급 영화들을, 일본에서 60년대와 70년대 중반까지를 풍미한 <수라설희> 시리즈. <여죄수 사소리 시리즈> 또는 <동경 은나비>시리즈를 알고 좋아한다면 이번에 복원된 박노식 감독의 영화 <왜?>를 보고 충분히 즐길 수 있다. 박노식 감독의 <왜?> <집행유예>에는 일본 B급 영화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호쾌한 장면들이 줄기차게 등장하기 때문이다. 늘씬한 반라의 미녀들이 텀블링을 하며 납치된 자의 따귀를 발바닥으로 때리는가 하면, 그네 기요틴까지 등장한다. 분열된 자아들이 도플갱어가 되어 활개를 치고,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며, 기괴한 변태들이 등장하고, 정수리에 총구멍이 난다. 마카로니 웨스턴과 한국 액션영화, 일본 B급 영화의 피가 뒤섞인 이상한 박노식표 액션영화들을 다가오는 5월에 만날 수 있다. 스즈키 세이준의 영화를 보고 즐겼던 영화광들이라면 박노식 감독의 그로테스크한 자의식 과잉의 액션영화들을 보고 충분히 반하리라 믿는다. 끝으로 복원에 애를 쓴 영상자료원 직원들에게 고마움의 인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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