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촬영감독] 1960~70년대 촬영감독 좌담회 한국 영화계에서 촬영감독으로 산다는 것

by.민병현(한국영상자료원 경영기획부) 2011-05-18조회 1,817

진행 김홍준/ 영화감독,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화과 교수
참석 전조명, 서정민, 이석기, 박승배
정리 민병현/ 경영기획부

원로 촬영감독들의 데뷔
김홍준(이하 ‘김’) 우선 좌담회에 참석해주셔서 감사하다. 오늘 이 자리는 1960~70년대 영화 촬영현장과 환경에 대해 듣고, 영화를 시작하는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을 담기 위해 마련되었다. 우선 데뷔 시절 이야기부터 듣고 싶다.
전조명(이하 ‘전’) 군대를 제대하고 처음 김수용 감독과 만났다. 당시 김수용 감독은 <공처가>를 만들고 있었다. 촬영기사는 이 영화의 제작자가 이미 정해놓은 상태였고, 난 이 작품의 조감독(연출부)을 맡았다. 촬영감독으로 데뷔한 것은 김수용 감독의 1959년 작 <삼인의 신부>다. 당시 초보인 나에게 영화에 대해 가르쳐줄 선배가 없었다. 바로 현장에 투입되었는데 솔직히 너무 암담했다. 노출이나 조명 등이 잘 맞지 않고, 계속 배우면서 촬영했다. 김수용 감독과 그게 인연이 되어 41편의 작품을 같이 했다. 첫 작품을 찍었던 카메라 기종은 ‘ARRI 2A’ 다. 필름이 미군부대에서 나온 100자짜리였다. 이걸 400자 연결해서 사용했다.
서정민(이하 ‘서’) 영상자료원 기록에는 데뷔작이 <언제까지나 그대만을>(권영순, 1959)로 되어 있는데 사실 1961년 임원직 감독의 <촌놈 오복이>로 데뷔했다. 이 작품은 원래 다른 사람이 촬영을 시작했는데 중간에 그만두면서 내가 맡게 되었다.
이석기(이하 ‘이’) 대학 다닐 때부터 5년간 충무로에서 현장 일을 돕다가 1966년 노진섭 감독의 <보경아가씨>로 입봉했다. 이후 정인엽 감독의 <명동 왈가닥>(1967)을 촬영했다. 나의 경우 처음부터 영화에 뜻이 있었다기보다 못 먹고 못살던 가난한 시절이라 영화현장에서 빵을 주는 것이 너무 좋았다(웃음) .
서 당시 좋은 학교를 나와도 일자리가 없어 취직이 안 됐다. 하지만 1960년대 영화계는 사정이 좋아 일자리가 많았고, 젊은 인력들이 영화계로 많이 유입되었다. 사담이지만 명동의 술집은 언제나 영화 스태프들로 넘쳤다.
박승배(이하 ‘박’) 한형모 감독이 <자유부인>을 제작할 당시 제작부에 계신 고모부의 소개로 처음 영화현장에서 일을 도왔다. 이후 1963년 최호진 촬영감독의 제자로 들어가 편집일을 시작했고, 그해 정진우 감독의 <외아들>로 촬영부에 들어갔다. 촬영감독으로 데뷔한 것은 1967년 정진우 감독의 <폭로>였다.

짝패, 촬영감독과 감독
모두 20대에 입봉을 했다. 당시 어린 나이에 입봉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나?
195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한국영화산업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렇기 때문에 1960년대 후반부터 영화현장에 새로운 인력이 많이 참여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젊은 나이에 스태프를 상대로 촬영을 지휘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기도 했지만 현장엔 젊은 인력이 많아 큰 문제는 없었다.
당시 일반 대중이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여가생활은 영화관람이 전부였다. 나 같은 경우 고등학교 때부터 사진에 관심이 많았는데, 이것이 인연이 되어 대학교 4학년 때부터 영화현장에서 조수로 일을 시작했다.
당시 젊은 나이에 오갈 데가 없어서 영화 일을 시작한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생계유지를 위해 현장에 나온 사람 대부분이 오래 버티지 못했다. 나 역시 배가 고파 영화를 시작했지만 하다 보니 관심이 생기더라. 당시 현장에서 대학노트로 몇 권이나 되는 분량을 스케치했다. 그것들을 감독에게 보여주고 상의하며 영상을 만들어내는 법을 익혔다.
오늘 모인 네 분은 196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한국영화사에서 의미 있는 많은 작품을 함께 했다. 그러면서도 유난히 한 감독과 파트너십을 유지했다.
이원세 감독과 10여 년을 함께 작업했다. 한 감독과 오랜 시간 함께하려면 소통이 가장 중요하다. 처음 기획부터 촬영, 믹싱, 편집, 그리고 프린트가 나올 때까지 지속적으로 감독과 상의해야 한다. 예컨대,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1981)은 염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다. 이원세 감독과 이 영화를 작업할 당시 자연광을 살리기 위하여 감독과 상의해 일몰, 일출시간에만 촬영했다. 감독 특유의 표현력과 스타일을 만드는 데 촬영감독의 역할이 그만큼 중요했다고 볼 수 있다.
난 김수용 감독과 늘 함께했다. 하지만 늘 의견이 맞았던 것은 아니고, 종종 의견 충돌이 있었다. 그때마다 김수용 감독은 리드를 잘했고, 난 내조를 잘했던 것 같다(웃음). 김수용 감독의 장점은 정확한 콘티였다. 늘 머릿속에 촬영할 신(scean)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에 그날 촬영 분량이 남거나 모자란 경우가 거의 없었다. 김수용 감독은 언제나 정확하고, 연기지도도 잘하는 통솔력 있는 감독이었다.
임원직 감독의 <인력거>(1961)에서 이만희 감독과 처음 만났다. 당시 이만희 감독은 조감독이었다. 이만희 감독은 데뷔 이후 줄곧 흥행과 평단의 평판이 모두 좋았다. 이만희 감독의 처음 두 작품(<주마등> <불효자>)은 임원직・민정식 촬영감독과 함께 했고, 이후 나와 함께 작업했다. 함께 작업한 첫 작품은 1962년 추리극 <다이알 112를 돌려라>였다. 호흡이 잘 맞았고, 흥행도 잘됐다. 이후 서로 믿음을 갖고 오랜 시간을 함께했다.
지금은 현장에 모니터가 있어서 많은 스태프가 현장에서 바로 촬영된 영상을 확인할 수 있지만, 당시 촬영화면을 카메라를 통해 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감독과 촬영감독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둘의 호흡은 매우 중요했다. 감독의 속마음을 촬영감독이 정확히 짚어내야 했고, 시나리오의 흐름, 색깔 등을 촬영감독이 촬영 전에 미리 그려내어 감독과 상의해야 했다. 난 10편 이상 함께 작업한 감독이 많다. 이만희 감독과도 11편을 함께 했다. 정인엽 감독과도 20여 편, 고영남 감독과도 10여 편을 했다. 촬영감독의 역할이 크다 보니 서로 신뢰가 한번 쌓이면 그 후로도 오랜 시간 함께하게 된다.
모두 연출 경력을 가지고 있다. 촬영감독임에도 어떻게 연출을 하게 되었나?
한 제작자가 어떤 영화를 기획하는 과정에서 여러 감독을 섭외하다가 나에게 연출을 제의해왔다. 처음에는 촬영 경험만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망설였지만 감독의 요청에 못 이겨 일단 연출은 거절하고 시나리오만 썼다. 이후 <성리수일뎐>(1987) 등 10여 편의 영화를 연출했다.
1966년 <동대문시장 훈이 엄마>를 감독했다. 흥행에도 제법 성공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당시 감독은 지방흥행사 관계자들과 술자리도 많이 해야 했고, 투자를 받기 위해 비위도 맞추는 등 영화 외적으로 힘든 점이 많았다. 연출자로서 해야 할 부수적인 일들이 너무 많았고, 그런 것들이 나하고는 영 맞지 않았다. 그래서 그만두었다.

촬영감독과 촬영기술의 발전
기술적인 이야기로 넘어가보자. 1960년대 초까지는 스탠더드(1.33:1) 촬영방식이 일반적이었는데 언제 시네마스코프로 넘어갔나?
내가 처음 시네마스코프로 촬영한 것은 1965년 김수용 감독의 <저 하늘에도 슬픔이>였다. 하지만 당시 시네마스코프 렌즈가 없어 영사용 프리마 렌즈를 개조해 촬영했다.
이만희 감독의 <돌아오지 않는 해병>(1963)이 내가 찍은 첫 시네마스코프 작품이다. 나 역시 직접 영사용 렌즈를 사다가 시네마스코프 렌즈로 개조해 촬영했다.
당시에는 장비나 카메라를 직접 만들어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나?
그렇다. 우스갯소리로 당시에는 시네마스코프 렌즈만 가지고 있으면 촬영감독 시켜준다던 말까지 있었다(웃음). 장석준 촬영감독이 그 분야에서는 가장 선구적이었다.
컬러 시네마스코프 촬영방식을 지속하다가 1980년대 중반 이후부터 비스타비전 사이즈 (1.85:1) 촬영방식이 일반화된다.
그렇다. TV가 일반에 광범위하게 보급되면서 영화를 방송국에 팔기 위해 방송용 포맷에 맞추려고 비스타비전 사이즈를 택했다.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촬영감독들이 선호했기 때문이다. 비스타비전 사이즈로 촬영하면 시네마스코프에 비해 선명한 화면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보다 조금 앞서 1976년에 <엄마 없는 하늘아래>(이원세)를 스탠더드로 촬영했다. 당시에는 천편일률적으로 시네마스코프였는데 나름 파격적이었다.
당시 필름비가 영화 제작비의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작비를 줄이려고 테크니스코프도 많이 사용했다.
그동안 테크니스코프로 만들어진 영화를 네거티브 필름에서 프린트를 뜰 수 없었는데, 현재 영상자료원에서 테크니스코프 네거티브 필름을 원 포맷인 시네마스코프 사이즈로 디지털 복원 중이다.
테크니스코프 촬영방식이 제작비를 줄이기 위해 한국에서만 사용한 독특한 방식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사실 이 방식은 유럽에서 먼저 사용되었다.

1960~70년대 촬영현장

현장에 있어보니 카메라와 필름이 귀하기 때문에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 분야가 바로 촬영이더라.
일단 카메라를 들면 위험하거나 어려운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촬영해야 한다는 생각이 더 컸다.
고가의 카메라 장비를 다루기 때문에 현장에서는 늘 긴장하고 있어야 한다. 예전에 촬영하다가 고정해놓은 카메라가 저수지 언덕에서 넘어진 적이 있다. 당시 촬영 스태프가 몸을 던져 카메라를 보호했다. 그 친구는 많이 다쳤다. 그렇기 때문에 촬영부에서는 규율도 엄했다. 촬영이 잘못되면 수정을 못하기 때문에 조수에게 기합을 주는 일도 다반사였다.
예전과 비교해 요즘의 촬영감독은 책임이 덜하다. 현장에서 모니터로 자신이 찍은 부분을 확인하고 미흡한 부분을 다시 촬영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시에 촬영감독의 책임은 막중했다. 카메라의 성능이 나빠 전적으로 카메라를 믿을 수도 없었고, 직접 포커스를 맞춰야 했다. 또 정품을 사용할 여건이 되지 않아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것들을 사용했기 때문에 카메라 고장도 잦았다. 배터리도 날씨가 조금 추워지면 돌아가지 않았다. 1950~60년대 촬영감독은 카메라 분해와 조립에 능숙한 기술자들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워낙 촬영을 많이 해 에피소드도 많았을 것 같다. 이석기 감독의 경우 <창공에 산다>(이만희, 1968)는 직접 공군 전투기를 타고 촬영했다고 들었다.
20시간 동안 F5를 타고 촬영했다. 20시간 비행기록 보유자다(웃음). 실제 공중에서 전투기의 움직임을 보여줘야 했기 때문에 배경에 나올 구름이 많은 곳을 찾아 다니며 촬영을 했다. 하지만 공간이 협소해 카메라를 고정하는 도중에 배터리에 이상이 생겼다. 상식적으로 다시 지상으로 내려와 배터리를 교체하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비행기 연료를 다 소진한 후에야 내려올 수 있었다. 그래서 연료를 빨리 소진하기 위해 음속돌파, 회전 등 별의별 묘기를 다했다. 그것을 20일간 계속하니 고막이 터지더라. 촬영이 끝나고 조종사가 나에게 미친놈이라고 했다. 만약 알았다면 못했을 거다(웃음).
나도 비행기에서 촬영한 경험이 있다. 1984년 뉴욕 상공에서 촬영한 적이 있는데, 투어용 헬리콥터의 문을 떼어내고 카메라를 고무줄로 묶어 촬영했다. 당시 조종사가 나에게 낙하산을 입혀주며 “돌발상황에는 줄을 당겨라”라고 일러줬다. 그 말을 들으니 무서워서 못하겠더라.

내일의 촬영감독들에게
2000년대 들어 디지털카메라가 보편화되었다. 요즘은 영화를 만들 때 필름이 필요치 않다. 어떻게 보면 이제는 필름으로 영화를 만들고, 필름 기반의 영화를 가르친다는 것이 사치스러울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가르치는 입장에서 필름 교육을 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나? 아니면 시대변화에 따라 과감하게 디지털 촬영만 가르쳐도 될까?
현장에서 모니터를 하는 등 제작환경에서 디지털이 가져온 편리한 부분은 긍정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영화를 시작하려고 전문 교육을 받는 학생들에게는 필름 교육이 필요하다. 오랫동안 촬영을 한 사람으로서 필름으로 찍은 화면의 질감이 디지털보다 좋다고 생각한다. 또 다른 이유는 보존의 문제다. 영화든 방송이든 오리지널 네거티브는 필름이어야 한다. 일례로 SBS 드라마 <모래시계>는 방송용 테이프로 촬영했는데, 아쉽게도 원본이 손상되어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반면 의 경우 필름으로 촬영된 것은 거의 다 남아 있다. 방송국 역시 보존 등 넓은 시각에서 필름으로 찍어야 한다.
같은 생각이다. 디지털 환경에 따라 촬영방식이 변화하는 것은 막을 도리가 없지만 후대를 위해 보존하려면 필름이 있어야 한다. 예전에 촬영감독협회에서 이와 관련된 세미나를 한 적이 있는데 당시 미국 관계자들도 영상의 디지털화를 진행 중에 있지만 결국 보존을 위해 필름은 유지해야 한다고 했다. 꼭 부탁하고 싶은 것은 학교에서만큼은 필름으로 촬영하고, 필름 다루는 법을 가르쳐야 한다. 디지털은 원색화되어 있는 반면 필름은 사물 자체가 본색으로 표현되기 때문에 대체할 수 없다고 본다.
보존을 위해서는 필름이 바람직하다. 하지만 촬영의 경우 경제적인 면을 고려할 때 디지털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그리고 현재 영상연구소들이 디지털 기반의 새로운 컬러를 연구하고 있다. 테스트 단계지만 직접 눈으로 확인하니 현재 구현되는 색감과는 다른 색감을 만들어내더라. 나 같은 경우 극장에서 볼 때 필름의 색감이 더 좋다. 하지만 현재 젊은 세대는 화질이 더욱 선명하고 색감이 좋은 디지털 화면을 더 선호할 수 있다. 기술 환경과 관람자의 수요에 따라 앞으로 디지털화가 더욱 빠르게 진행될 것으로 본다.
끝으로 영화계와 영화를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조언한다면?
전 현재 한국영화 산업 규모에 비해 영화를 지망하는 학생들이 너무 많다고 생각한다. 수요와 공급이 맞아야 한다. 이를 위한 정부의 정책적 지원과 학교-정부 간의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하다. 그렇게 해서 전문 영화교육을 받은 이들이 최대한 많이 현장에 투입될 수 있게 해야 한다. 영화기술이 계속 발전하며 지속했듯이, 한국영화도 앞으로 지속적으로 발전할 것이라 생각한다.
디지털 기반의 제작환경이 되면서 많은 젊은이가 영상을 공부하고 있다. 사회가 이들을 흡수할 수 있도록 제도적 지원이 필요하다.
예전에 비해 영화를 제작하는 장비가 매우 좋아졌고, 제작비 역시 증가했지만, 정작 작품의 질은 예전만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 가장 큰 이유가 ‘흥행’만을 생각하고 영화를 만들기 때문이다. 이들이 영화를 만드는 데 있어 기본과 원칙을 마음에 간직하고 지켜나간다면 한국영화의 앞날은 밝을 것이라 생각한다.
‘영화’와 ‘영상’을 구별해야 한다. ‘영상’은 아이폰으로 누구나 만들 수 있지만 ‘영화’는 생명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를 만드는 사람의 정신이 담겨야 한다. 요즘처럼 영상이 범람하는 시대에는 영화에 대한 원칙을 가르쳐야 한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한국고전영화를 많이 보여주려고 노력한다. <갯마을> <돌아오지 않는 해병> <족보>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등 고전영화를 접하는 학생들은 시나리오나 연기에 대해서는 어색해해도 촬영에 대해서는 감탄한다. 우리 영화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지속적으로 발전해왔다. 당시 한국영화의 촬영은 동시대 유럽과 미국 영화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한국영화의 발전에 촬영감독의 기여가 컸던 점이 제대로 평가를 받을 날이 오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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