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촬영감독] 1960~70년대 한국영화로 보는 촬영기술의 변화 촬영기술의 변화와 근대

by.김미현(영화진흥위원회) 2011-05-04조회 4,826

영화의 촬영방식과 미학에서 기술의 영향력은 매우 크다. 신기술의 도입은 제작방식과 산업지형을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영화의 스타일, 미학적 요인, 그리고 관객 경험까지 새롭게 형성하는 역사적 변환의 기반이다. 1960~70년대 한국영화 촬영기술의 핵심은 6・25전쟁 후 도입된 컬러와 시네마스코프에 적응하고 활용하는 지점에 있었다.

한국영화사에서 컬러와 시네마스코프는 각각 다른 전사(前史)와 경로를 밟아 지배적인 영화기술 양식이 되었지만, 그 상업적 출발은 모두 1961년 <춘향전>(홍성기)과 <성춘향>(신상옥)의 대결에서 비롯되었다. 1958년 <생명>에서 흑백 시네마스코프가 시도되었고, 광학적(optical) 방식의 컬러영화는 1948년 홍성기 감독의 16mm 작품 <여성일기>로 재현되었지만 그 성과는 미미했다. 이 기술들은 1950년대에 일련의 과정을 거쳐 <성춘향>과 <춘향전>을 통해 기술적, 산업적 수용이 이루어졌다.
1962년부터 우리나라의 화면은 가로세로 화면비율이 2.35:1인 시네마스코프가 정착되었으며, 컬러는 사극을 중심으로 그 편수를 확대하다가 1969년에 이르러 지배적인 양식이 되었다. 1960년대를 거쳐 변화한 영화기술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한 신진그룹이 대두되는 배경이 되었다. 정성일, 전조명, 유재형, 장석준 등의 촬영감독들은 전쟁 후 열악한 기술 환경에서 능동적으로 촬영기술을 발전시켜왔다.

시네마스코프 촬영기술
시네마스코프가 가로세로 화면비율이 4:3인 스탠더드 화면을 대체하면서 넓어진 종횡비와 애너모픽 렌즈(anamorphic lenz)를 사용한 촬영기술을 익히는 것은 촬영감독에게 중요한 사명이었다.1 정일성은 “<성의>(Robe, 1952)를 수십 번 보면서 화면의 크기, 구도, 여백의 활용 방식을 연구”했다고 증언하고 있으며, 전조명 감독도 “시네마스코프를 너무 하고 싶었고 마치 특수효과처럼 할 수 있는 사람만 하는 것으로 인식되어서 열악한 기재조건에도 불구하고 시네마스코프로 촬영했다.”고 회고했다.

시네마스코프는 화각이 넓어져 스탠더드 화면에서 32~35mm인 표준렌즈는 시네마스코프에서 50~52mm를 사용해야 같은 거리감이 보장된다. 표준렌즈의 초점 길이가 길어지면 재현된 화면의 공간감은 얕아진다. 같은 조건에서 촬영할 경우 시네마스코프는 스탠더드 화면보다 공간 심도가 얕아져 광각렌즈를 사용해도 같은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시네마스코프는 전경에서 후경까지 초점이 맞는 전초점(deep-focus)을 구사하기 어렵다.

1960~70년대 시네마스코프라는 기술적 조건에서는 얕아진 공간의 깊이감을 보상하기 위한 촬영기술이 발달했다. 화면의 전, 중경에 위치한 물체나 배우는 소실된 공간감을 중첩된 프레임 면으로 보상하면서 넓은 공간을 채우는 기능을 하기 위해 다양하게 배치되었다. 부피감을 주는 측면 연출과 사선을 강조하는 프레임도 사용되었다. 피사체를 중심에서 이탈한 지점에 위치시키는 파격적인 구도도 나타난다. 촬영 각도도 다양하게 구사되었다. 앙각(low angle), 부감(high angle), 사선각(oblique)은 인물의 심리를 역동적으로 풀어가는 데 중요한 기능을 한다. 또 시네마스코프 촬영은 조명이 복잡해지고 많은 조명량이 필요하다. 이에 따라 자연광을 활용할 수 있는 야외 촬영이 증가했다.

시네마스코프의 미학적 활용 폭이 넓어지면서 넓은 종횡비가 근대화 담론을 시각화하는 형식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쌀>(신상옥, 1963), <고려장>(김기영, 1963)과 같은 영화에서 펼쳐지는 시네마스코프의 수평구도와 파노라마 쇼트는 근대의 가치 서사를 전달하는 데 효과적으로 사용된다. 반면, <귀로>(1967)와 <안개>(1967)에서는 시네마스코프의 넓은 프레임이 오히려 무기력한 고립과 단절을 표현하고 있다.

컬러와 미장센의 효과
한국영화에 색채가 도입되면서 가장 큰 변화는 미장센 기능이 전면적으로 강조된 점이다. 컬러필름은 흑백필름보다 공간을 표현하기 더 어려운 요소를 갖고 있다. <성춘향>에 사용된 필름은 코닥 타입 5245였는데 ASA50인 저감도 필름이었고 비교적 고감도인 코닥 필름 타입 5247은 1978년부터 한국에서도 현상이 가능해져 사용할 수 있었다. 감도가 낮은 컬러의 특성상 촬영 시 조리개를 최대한 열고 조명을 여럿 동원해야 했기 때문이다. 조명에서 대상을 정확하게 보이게 하기 위한 ‘플랫 라이팅(flat lighting)’이 구사되었고 키 라이트(key light)의 비중도 커졌다. 컬러필름은 조도가 극히 높을 때에만 선명한 공간을 연출할 수 있었으나 조명 조건이 충족되지 않자 안전한 촬영방식이 선호되었다.

전방의 물체, 인물, 창틀 등을 배치함으로써 공간의 중첩 면을 늘리는 경향이 더 강해졌다. 조명, 소품, 의상 등은 공간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의 기능을 하였다. 컬러의 원색 효과도 강조되었다. 1960년대 한국영화에서 조명은 극단적으로 강렬하며 꿈, 환상 장면에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다. 조명의 원색으로 구분된 프레임 면은 <성춘향>뿐만 아니라 <화랑도> <인목대비> (1962) 등의 초기 컬러 사극에서부터 인물의 성격, 장면의 특성을 표현하고 있다. 컬러영화의 중요한 표현요소로 실내의 소품 배치도 거론할 수 있다. 관습적으로 놓인 소품들은 화면의 깊이를 주고 공간을 구성하는 방식이었다. 1960년대 말의 신파 멜로드라마에서 원색의 컬러는 공간의 감상성을 증폭하는데도 종종 사용되곤 했다.

테크니스코프와 자체제작 기재의 활용
1970년대의 영화산업 위기와 불황은 한국 경제성장, TV의 등장, 그리고 4차 영화법 개정으로 이어지는 유신시대의 그늘에서 발생했다. 이에 따라 경제적인 촬영기술을 도입하고 부족한 기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체적으로 기재를 제작하는 경우가 많이생겼다. 1970년을 전후하여 시도되었던 새로운 기술은 입체영화, 70mm 영화, 그리고 동시녹음이 있었다. 70mm 영화는 <춘향전>(1970) 한 편만이 완성되었고, 동시녹음도 <대원군>(1968) 한 편에 그치고 말았다. 이 사례들은 그다지 성공적이지도 새로운 기술표준으로 전환되지도 못했다.

1970년대의 영화기술을 논하면서 장석준 촬영감독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영화촬영감독, 신진현상소 대표, 감독, 제작자 등으로 다양하게 활동하면서 입체영화, 70mm, 테크니스코프 카메라 등을 제작하거나 개조했다. 장석준이 개조한 입체영화 촬영기는, 카메라 한 대에 2개의 렌즈, 2개의 필름 매거진을 장착해, 한 대의 카메라에서 프레임의 반만 사용해 촬영한 필름 두 벌을 인화과정에서 하나의 프린트로 만드는 방식이었다. 스크린에 상영할 때는 미러박스를 통해 2개의 이미지가 스크린에 겹치도록 영사되었다. <천하장사 임꺽정>(이규웅, 1968), <몽녀>(임권택, 1968), <지지하루의 흑태양>(장석준, 1971) 등이 입체영화로 제작되었다.

1970년대의 새로운 영화기술이 단발적인 현상이었던 것과 달리, 테크니스코프는 1970년대 영화에 약 20%가량 사용되면서 시네마스코프를 보완한 촬영 기술로 널리 활용되었다. 테크니스코프는 한 프레임을 2 퍼포레이션으로 사용하여 시네마스코프 비율을 만들어내는 촬영방식으로 카메라의 개조원리는 입체영화와 같았다. 이 방식은 네거티브 필름이 절반밖에 들지 않아 경제적인 방식으로 이용되었다. 원로 영화인들은 테크니스코프를 프레임의 절반만 사용해 촬영한다는 물리적 특성을 비유한 ‘투 파프레이션’, 또는 ‘하프 사이즈’라는 별칭으로 기억하고 있다. 테크니스코프는 근접 촬영이 가능해서 좁은 세트장 이용 시 편리하고 조명도 적게 사용할 수 있었다. 테크니스코프로 촬영한 필름은 현상 후 인화과정에서 일반 영사가 가능하도록 확대해 시네마스코프와 동일한 방식으로 영사했다.

1960년대 후반부터 줌렌즈가 광범위하게 사용된 것도 촬영기술의 중요한 변화다. 줌렌즈는 1960년대 말부터 사용 빈도가 높아지면서 1970년대에는 카메라 이동을 대체할 수준으로 증가했다. 줌렌즈와 테크니스코프는 권격, 액션영화의 결투장면에 특히 편리한 장점이 있었다. 테크니스코프는 적은 양의 필름을 장착해도 상대적으로 오래 찍을 수 있어서 기동성이 뛰어나다. 여기에 줌렌즈를 사용하면 더 빠르게 피사체에 접근할 수 있었다. 즉, 경제적인 촬영에 적합했다.

촬영기술의 변화와 근대
한국영화가 가장 많이 제작되던 1960~70년대 영화기술은 컬러와 시네마스코프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70년대 말 영화의 텔레비전 방영과 외화의 영향으로 사네마스코프의 넓은 종횡비가 다시 1.85:1의 비스타비전 비율로 대체되었다. 이로써 1960~70년대 한국영화 촬영의 중요한 요소이던 시네마스코프 비율은 역사의 한 시기 동안 사라지게 되었다.
이 시기에 영화인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 수입된 기재와 외화의 촬영방식에 적응하며 기술과 스타일을 구사했고, 때론 자체적으로 조립한 카메라와 장비로 영화를 제작했다. 근대화 시기에 도입되어 산업적인 확산을 거쳐 소멸한 이 촬영기술들은 우리 영화사뿐 아니라 한국 근대의 어떤 단면을 함축하고 있다.

* 이 글은 (김미현, <한국 시네마스코프의 역사적 연구>, 중앙대 박사논문, 2005)을 참고해 작성됐으며 이에 따라 세부적인 각주는 생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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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시기의 시네마스코프는 피사체의 횡폭을 2분의 1로 축소하는 아나모픽 렌즈를 사용하여 스탠더드 비율보다 2배의 폭을 찍고 영사 시에 횡폭을 두 배로 확대해 넓은 화면을 만드는 방식이었다. 최근에 다시 활용되고 있는 시네마스코프는 프레임을 2.35:1로 마스킹(masking)하여 비율을 만드는 방식으로, 1950년대 미국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사용되었던 종전의 시네마스코프 촬영방식과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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