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만리>(1941)는 상하이에서 활동했던 전창근 감독과 나운규의 촬영감독에서 일본을 거쳐 제작·배급자로 변신한 이창용이 만나 조선은 물론 만주와 일본을 영화적 무대이자 시장으로 삼았던 전대미문의 스케일과 제작 규모, 새로운 기술적인 시도로 당대 조선영화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작품이다. 현재 필름이 남아 있지 않아 1941년 3월 개봉에 이르기까지 상세한 소식을 전한 당시 신문기사로만 이 영화의 전모를짐작할 따름이다. 시나리오 집필에서 개봉까지 무려 2년 5개월이 걸렸고, “등장인물 3,000명”에 “총제작비 10만원”이 소요됐다고 한다.
1930년대 조선영화계는 침체기를 겪으며 변화를 요구하는 암중모색의 시기였다. 1935년 조선 최초의 발성영화 <춘향전>이 “매일 매야 초만원의 성황”을 이루면서 무성영화보다 약 세 배의 제작비가 필요한 토키영화 제작을 위한 자본과 기술의 확보가 시급하다는 문제의식과 함께 기업화의 요구가 터져 나왔다. 나운규영화의 촬영기사로 활약하다 일본 신코키네마의 기술부를 거친 이창용은 조선영화계의 현실 속에서 절실히 필요했던 ‘영화기업가’로서의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조선 땅을 다시 밟았고, 고려영화배급사를 거쳐 1937년 배급과 제작을 겸한 고려영화협회를 설립했다. 한편 윤백남프로덕션에서 연출수업을 하고 상하이로 건너가 정기탁, 이경손 등과 함께 활동한 전창근은 1937년 귀국해 이창용의 고려영화협회에 입사, 설립기념 대작 <복지만리> 시나리오 집필을 시작했다. “중부조선, 북부조선의 함북 무산, 만주, 동경 등지에서 촬영하야 일본 내지어, 조선어, 만주어의 혼어(혼어) 토키로 될 대작품”이라는 기사 내용처럼 이창용은 조선의 시장규모와 취약한 제작시스템을 만주, 일본시장으로 눈을 돌림으로써 돌파하고자 했다. 만주영화협회와의 공동제작을 이끌어내 “선만(鮮滿)영화의 첫 악수”이자 조선에서 일본으로 또 만주로 떠도는 조선인 노무자의 현실을 그리며 ‘만선일체’를 표방해 일본의 만주이주정책 등 시국에 기민하게 부합했던 작품이기도 했다. <복지만리>는 최초로 크레인 촬영을 시도하고 조선영화 현장에 콘티를 도입했으며, 연출력에서도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