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강이관, 2005)

by.윤성호(영화감독) 2011-01-10조회 1,960
사과

민석(이선균)은 상상력이 뛰어난 남자다. 7년을 만나는 동안 은근 궁합도 잘 맞고 지인도 공유하며 사실상 부모 상견례 과정도 마친, 그리고 여전히 제 보기에 아름답고 씩씩한 애인 현정을 보며 괜한 상상을 한다. ‘얘가 나를 차지할수록 내 속의 무언가를 잃어가겠지, 현정이 없이도 살 수 있을거야.’ 상상력이 뛰어난만큼 겁도 잘 먹는 셈. 그리하여 결별. 

상훈(김태우)은 상상력이 약한 남자다. 오래 사연을 나눈 애인과 방금 헤어진 이성에게 ‘일하는 빌딩에서 제일 예쁘다’는 명제 하나로 대시한다. 고향도 종교도 취향도 다르며 한창 시절을 공유한 것도 아닌 현정과의 만남을 어눌하게 낙관한다. 앞으로의 서사를 미리 구성해보는 기술이 없는 대신 당장의 현실에선 담백해 보인다. 그리하여 청혼.

현정(문소리)은 자만하진 않되 ‘자존심’은 강한 여자다. 따라서 ‘자존감’이 낮아지는 상황을 견디지 못한다. 솔직하고 적극적이지만, 어쩌면 솔직하고 적극적인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솔직하고 적극적인 인격을 코스프레하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일종의 자가발전. 그러나 이 엔진에 연료는 있어야 하기에 상훈의 프로포즈를 (스스로의) 예상보다 냉큼 접수한다. 이전 연인과의 수년 에피소드를 리셋하기 위해 전형적인 통과의례에 매진한다. 그리하여 결혼. 

같은 교회를 다니고 집을 장만하고 아이가 생기고, 그렇게 어떤 간격은 생각보다 긴해지지만, 기본 미션을 해결한 후엔 그저 탄탄하리라 생각했던 동행은 마음같지 않게 삐걱거린다. 지방근무, 성격차이, 아이양육, 변하는 시절과 마음, 속절없는 옛 생각. 그러다 문득 현정은 텅 빈 대관람차에 다시 민석과 앉아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게 아닌데….’ 

감독은 이 영화의 덕목 중에 하나로 ‘누군가에게 사과를 하고 싶은 마음’을 들었다. 4년 전 영화를 첫 관람했을 때는 그게 무슨 소린가 했는데 어느새 조금 먹은 나이, 여태 철없는 나도 그 의도에 고개를 주억거린다.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사과를 하고 싶다. 바로 옆에서 휴대폰이라도 만지작거리고 있을 것 같은, 너와 나를 닮은 캐릭터들. 갸우뚱 근심하고 오롯이 설레는 표정들을 과장과 포장 대신 애정과 유머로 잡고 있는 화면을 보며, 공감으로 무릎을 탁탁 치는 이도 있고 회한으로 가슴을 쥘 사람도 있으리라. 나는 우선 저 인물들 옆에 눕고 싶다. 

<사과>(강이관, 2005)는 2005년에 만들어져 2006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환대를 받았지만 2008년에야 작게 개봉을 했다. 각본과 연출을 맡은 강이관 감독은 그때나 지금이나 총각. 그러니 (그것과 무관하게) 실망하지 말자. 우리의 어떤 인연들처럼 영화 <사과>는 길게 은은히 그 향기를 번지게 할 것이다. 연애든 결혼이든 동행의 값어치는, 견적이 아닌 수명으로 판가름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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