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 앞의 한 카페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눈 김청기 감독님의 꿈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었다.
밤을 꼬박 새워 준비해 간 내 정성스러운 질문지는 김청기 감독님을 만나는 순간, 그저 의미 없는 텍스트로 전락해버렸고, 4시간 가까이 쏟아낸 김청기 감독님의 거침없는 열변은 하?국 애니메이션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관통하며 그가 왜 한국 애니메이션의 대부인지 확인시켜주었다.
어린 시절
“난 어린 시절 일본 적산 가옥에 살았었어. 벽에 회칠을 해서 벽면이 온통 도화지처럼 하얀 거야. 그래서 거기다가 그림을 그렸지, 난 참 그림을 그리는 게 좋았어, 그렇게 하얀 벽면에 온통 그림을 그렸는데,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우리 아버지가 야단을 치는 게 아니라 ‘야 너 그림 참 잘 그린다’ 그러면서 칭찬을 하는 거야. 아??지가 인정을 해주니까 그렇게 좋더라고, 더 열심히 하게 되고…그때부터 꿈을 꾸기 시작했지.”
당시의 문화적 시대 상황과 성장기
“모든 문화라는 게 사회적으로 엄청난 재난이나 전쟁을 겪으면서 기존의 것들은 결국 파괴돼버리고, 거기에서 새로운 문화가 싹트게 돼잖아. 일본이라는 나라가 그런 영향을 받으면서 우리보다 빨리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한 거야. 태평양전쟁을 겪으면서 일본은 재팬 애니메이션 스타일이 이미 시작된 거지. 당시 우리??라도 6?25전쟁 이후에 새로운 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했는데 6?25를 전후해서 김영한 선생의 <코주부> <삼국지> <똘똘이의 모험> 같은 만화들이 나오기 시작했어. 당시 <학원>이나 <아리랑> 같은 만화 잡지에 김성한 선생의 <고바우> <세모돌이> <네모돌이> 같은 아주 재미있는 만화가 많이 나왔지. 그 당시에는 그림이나 만화를 가르치는 곳이 없었기 때문에 난 그분들의 그림을 따라 그리기도 하고 미8군 부대에서 나오는 코믹스들을 보면서 꿈을 키워갔어. 그러다가 열아홉 살이 되던 해에 <무적의 오프린>이라는 단행본 만화책을 내게 됐고, 그게 꽤 잘되면서 본격적으로 길을 찾기 시작했지. 1970년대 초부터는 16밀리 카메라를 들고 소금강댐이나 구미고속도로 공사 현장 같은 곳을 찾아 다니면서 문화영화나 기록영화를 만들기도 했고, 통일 밀쌀이나 캉캉 스타킹, 라면땅 같은 제품의 CF들을 아주 원시적인 방식의 애니메이션으로 만들기도 했어.
태권브이를 만들기까지
“당시 난 <손오공>이나, <보물섬> <황금박쥐> 같은 작???의 원화 제작에 참여하고 있었어, 그러다가 월트디즈니가 만든 <백설공주>를 보고 커다란 충격을 받았지. 그때만 해도 애니메이션을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곳이 없어서 외국의 책을 보거나 외국에서 넘어온 필름을 분석하면서 애니메이션에 대한 기초적인 공부를 했었거든. 그러다가 월트디즈니가 만든 <백설공주>를 보고 완전히 문화적 충격을 받은 거야. 움직임, 효과, 음악, 모든 게 완벽했거든. 그래서 이걸 좀 해야 되겠다, 그런 생각을 하고 애니메이트??? 만화 동작들을 그리기 시작했어. 그러다가 TBC에서 일본에서 받은 OEM 방식의 작품 제작에 참여하게 된 거야. 그런데 일본 작품들은 스토리 위주로만 흘러가는 거야, 월트디즈니는 스토리도 물론 중요시하지만 어떤 동작이나 흐름에서 재미있는 요소가 있으면 그것을 중요시 여겨서 흥미롭게 살려내는데, 일본의 작품들은 소설의 삽화를 보듯이 만화가 갖는 그런 의미가 없었어. 그런 작업이 나한테는 싫증이 났었지. 그런데 <마징가>라는 일본의 애니메??션이 히트를 치게 된 거야. 난 겁이 덜컥 났지. <마징가>가 우리말로 더빙을 해서 방영되니까 우리 아이들이 <마징가>가 우리가 만든 건 줄 알고 열광했거든. 그때만 해도 애니메이터들 사이엔 반일 감정이 매우 컸었어. 일본의 애니메이션이 어린아이들의 정신까지 지배하니까 이렇게 가면 큰일 나겠다 그런 생각들이 든 거지. 그래서 애니메이션 하는 친구들과 후배들이 우리 거 한번 만들어보자는 생각으로 뭉친 거야, 그래서 <로보트 태권브이>가 시작된 거지. 한국의 ??권도를 하는 거대 로봇이 일본의 유도 로봇이나 가라테 로봇들을 때려 부수는 그런 상상을 하면서 말야.”
태권브이를 만드는 과정
“난 태권도를 전혀 못 했어. 그래서 태권도 유단자를 데리고 16밀리 카메라로 찍어서 한 프레임씩 태권도 동작들을 그려나갔지. 그런 기법은 월트디즈니에서는 이미 일반적이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최초의 시도였어. 그리고 그땐 달러가 해외로 유출되는 게 용납이 안 되는 시대였어. 미술용 연필이나 포스터 컬러 물감 하나 제대로 ???들지 못했으면서도 국산품을 애용하자, 뭐 그런 시대였지. 그러다보니 애니메이션을 만들기 위한 문구류가 거의 전무했어. 특히 애니메이션 제작에 필수적인 셀은 모두 수입이었는데, 셀의 수입조차 달러 유출 때문에 수급이 여의치 않았어. 그래서 병원을 찾아 다니면서 환자들을 찍었던 엑스레이 필름을 얻어다가 밤새 물에 불려서 화상을 긁어내고 그 위에 그림을 그리고 그랬지. 그런데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만들어진 작품도 온전하게 상영할 수가 없었어. 태권브이 장면 중에 김훈과 마사오라는 인물이 격투를 벌이는 장면이 있는데, 마사오라는 인물의 머리가 바람에 날린다고 검열에서 그게 잘려 나간 거야. 일주일을 꼬박 그린 건데. 그땐 장발 단속이 심했거든. 그렇게 만화는 영화보다 더 사전 검열이 심했어. 그땐 그런 시절이었어.”
그 후
“태권브이가 대 히트를 쳤지만 난 집 한 채를 고스란히 날렸어. 스토리보드, 원화, 동화 같은 것들을 거의 혼자 힘으로 했는데도 제작비가 많이 들어갔거든. ??리고 애니메이션에 대한 제작 기반이나 모델도 없었고. 그때 가족들이 살던 사당동 집이 1800만 원이었는데, 큰 빚을 진 데 충격을 받고 마누라가 입이 돌아갔어. 그때 마누라가 그러더라고 ‘당신은 이름을 얻었지만 우린 집을 잃었다고.’ 그래도 난 돈은 못 벌더라도 작품은 하나 남기자 이런 마음이었어.”
작품세계
“난 남이 보는 각도와 좀 다른 각도에서 봐야겠다, 난 좀 다르게 상상력을 펼쳐야겠다, 늘 그런 생각을 했었어. 만화영화나 애니메이션이라는 것이 스토리텔링도 중요하지만 순간적인 위트 같은… 애니메이션만이 가질 수 있는 특징들이 아주 중요하거든.
그리고 아무리 악한이라도 보는 사람이 악한으로서의 공포스러운 전율만을 느낀다면 난 그런 걸 철저히 배제했어. 아무리 권선징악의 스토리라도 악을 그런 식으로만 표현하면, 특히 어린아이들은 정서적으로 큰 상처를 받게 되거든. 누구나 선한 면만 가지고 사는 게 아니잖아, 숨겨져 있긴 하지만 동전의 양면처럼 어느 정도는 악한 면도 ?? 가지고 있잖아. 내가 아무리 양심적으로 산다고 하더라도 타인에게 거짓이나 숨겨야 할 것이 있는 거고, 그 자체는 누구나 용서받을 구석이 있는 거거든. 난 아이들에게 그런 걸 심어주고 싶었어. 나쁜 짓을 하더라도 용서를 받을 수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악한이 있나? 주위 환경에 의해서 악해지는 거지. 그리고 나도 아이들이 있으니까 내 아이들이 봐서 해악이 되는 것은 용납이 안 됐어.
내 아이들에게 보여줄 수 없는 걸 다른 아이들에게 보여준다는 것 역시 이율배반이었고. 난 내가 만든 영화를 보는 모든 아이가 뭔가를 얻고, 또 꿈을 꾸고, 커나가는 데 영양분이 됐으면 했어.”
좀 더 넓은 세계에 대한 욕심
“<공각기동대>를 만든 일본의 오시이 마모루는 정치적 이슈와 철학적 성찰을 애니메이션에 도입했지. 일본 애니메이션 작가로는 유일하게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고….
어느 날 난 그 친구의 작품을 보고 경악했어. 어떤 비즈니스 논리가 아니라 정말 작가가 갖는 어떤 행위가 아니냐! 그런 생각을 하면서 쇼크를 받았지! 그런데 안 되면 나이 탓이라고, 내가 좀 더 일찍이 그런 쪽으로 해봤으면 하는 아쉬움이 많아. 이렇게 아동영화만이 아닌 내가 할 수 있는 어떤 철학적 표현들을 가감 없이 펼쳐봤더라면 하는 아쉬움 말야. 그래도 난 아직은 기회가 있다고 생각해. 어느 시기가 되면 3분이나 5분짜리 쇼트 필름으로 내 작품 세계를 가감 없이 보여주어야겠다고 늘 생각하고 있거든. 참 멋있게 말야.”
일본의 애니메이션에 대해서
“내가 미야자키 하야오하고 같은 해에 태어났어, 내가 세상에서 가장 부러워하는 존재가 바로 그 친구야. 미국이 서유럽의 애니메이션을 보고 공부를 많이 했듯이 일본도 미국의 영향을 많이 받은 건 사실이야. 일본 초기 애니메이션의 스타일을 보면, 작품의 흐름, 애니메이션의 동작, 구성, 이런 것들이 거의 디즈니 스타일이거든. 태평양전쟁 이후에 나온 일본의 애니메이션들은 흑백TV가 보급되면서 이미 시장이 구축되기 시작한 거야. 결국 일본이라는 나라는 미야자키 하야오 같은 대가?? 나올 수밖에 없는 토양과 인프라가 이미 구축된 나라였지. 그리고 만화를 사랑하는 민족이잖아, 또 그러니까 만화왕국이 된 거고.
난 만화를 시작할 때 학부모들에게 참 많은 질타를 받았어. 아이들한테 문제가 있으면 불량만화, 비행만화 탓을 하면서 늘 희생양이 됐거든. 그러니까 미야자키 하야오가 얼마나 부럽겠어.”
한국 애니메이션의 현재와 미래
“조금 늦기는 했지만, 이제 우리나라도 수준 높은 인재가 많이 나오고 있는 건 틀림없어. 그리고 애니메이션을 육성하기 위한 정부시책이나 지원정책도 다양하게 쏟아져 나오고 있고. 다만 유감스러운 건 인큐베이터에서 자란 인재들이 인큐베이터 밖으로 나오면 갈 데가 없는 거야. 자립해야 되는데 자립할 수 있는 터전이 없는 거지. 키워만 놓으면 뭘 해, 현실이 그렇잖아, TV에서는 싸다고 전부 외국 거 들여와서 더빙해서 틀어대고. 2D, 3D 같은 극장용 애니메이션들은 돈이 된다고 수입만 하고 있고… 과거랑 다를 게 뭐가 있어? 우리 거 몇 개 실패했다고 우리 건 제자?을 안 하잖아. 투자도 안 하고. 하기 좋은 이야기로 너희들은 발표할 장이 많다, 많지, 인터넷이고 뭐고. 그런데 한 번으로 끝나는 거야. 더 이상 자력으로 할 수가 없는 거야. 얼마 전 까지만 해도 방화는 스크린쿼터라는 방어적인 제도가 있어서 나름대로 발전할 수 있는 토양이 있었는데, 애니메이션은 키워만 놨지 그대로 방치돼 있잖아. 시장도 형성이 안 돼 있고. 그러니까 인재들이 자기들의 재주를 펴나갈 길이 없는 거야. 서독이나 프랑스문화원 같은 곳을 가보면, 나라에서 키운 인재들이 만든 퀄리티 높은 고급 애니메이션 작품이 아주 많아. 나라에서 투자를 하는 거지. 인재들은 작품을 만들고, 나라는 그 작품을 사주고… 우리도 그렇게 아주 작은 일부터 시작하는 거야. 우리 이야기 좀 많아? 부모들 손을 잡고 우리나라 문화원을 찾아온 외국 아이들이 우리나라의 설화나 전설 같은 걸 애니메이션으로 보면서 얼마나 즐거워하겠어. 그렇게 10억 들여서 1년에 하나씩 만들면 10년 후엔 100억짜리가 되는 거야. 그렇게 차곡차곡 쌓아가면서 우리의 문화도 알리고 애니메이션도 활성화하면 얼마나 좋아. 그렇게 하나씩 만들어 나가다 보면 그런 게 바로 토양이 되는 거잖아. 월트디즈니가 몇 년 전 중국의 뮬란을 만들어서 히트를 쳤지만 우리 건 우리가 만드는 게 정석이야. 그게 바로 우리 문화를 살리는 길이고 우리가 할 일이야. 이것도 10년, 20년 지나면 고전 문화가 될 것들이잖아. 그때 가서 만들 수 없는 것들.”
후학들에게
“내 정서는 참 한국적이야, 일정 때 태어나서 6?25를 겪었고 한국 촌의 문화, 소쿠리, 질그릇, 이런 걸 몸소 체험하고 산 사람이지. 내가 아쉬운 게 그거야. 편한 얘기로, 우리나라 전래동화 그리는 거 보면 초가집이고 기와집이고 거의가 무대 세트 세워놓은 거랑 똑같아. 살아보지를 못했기 때문에 관념적으로 그리는 거지. 우리나라 초가집들은 전부 버섯 올라오듯이 땅에 묻혀 있어. 왜? 초가집들은 빗자루질을 하면 전부 담 옆으로, 기둥 옆으로 흙이 모이게 돼 있거든. 그런 개념을 모르고 그리니까 뭔가 부자연스러운 거야. 내가 안타까운 게 그런 거야, 그러니까 몸소 체험하고 연구해라 그거야, 그리고 더 늦기 전에 빨리 만들어라 그거야. 우리나라 설화, 전설 좀 많아? 그런 거 하나씩 만들어나가라 이거야. 그러면 나중에 국가적으로도 큰 자산이 되잖아.”
얼마 전 개봉한 <쏠라 원투 쓰리>에 대해서
“망했어!!!”
마지막으로
“어느 때부턴가 애니메이션의 작품 방향들이 캐릭터 사업을 위해서, 그저 상업 논리에 맞춘 것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먼저 작품이 살면 캐릭터가 갖는 가치는 자여?스럽게 높아지게 돼 있어. 우리 때만 해도 ‘이거 아니면 죽는다’라는 생각을 했었어. 애니메이션도 중요한 영상문화야. 잘 살리고 발전시켜야 돼. 아무리 그림이 좋아도 정신이 없으면 그 작품은 이미 죽은 작품이야. 나도 지금 ‘잃어버린 지구’라는 작품을 구상 중이야. 늘 작가라는 의식을 떠나본 적이 없기 때문에 아이디어가 있는 한 끝까지 가볼 거야.
끝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