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의 법칙> (장현수, 1994) 누아르 영화의 새로운 법칙

by.주성철(영화평론가) 2010-11-18조회 2,421
게임의 법칙

장르영화 혹은 액션, 누아르 영화들을 좋아하다 보니 어려서 한국영화와 가까워지지 못했다. 그나마 좋아할만한 한국영화들은 음침한 동시상영 극장을 채우고 있거나 이미 아동용 영화, 으악새 영화, 쌈마이 영화 등으로 불리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임권택 감독의 영화인 <길소뜸>(1985)조차 내 나이에 비춰보자면 오래전 영화였고, 배창호 감독의 <기쁜 우리 젊은 날>(1987)이나 박광수 감독의 <칠수와 만수>(1988) 또한 뒤늦게 VHS를 통해서 봤을 뿐 ‘개봉영화 관람’이라는 동시대성으로 호흡하지는 못했던 영화다. 곽지균 감독의 멜로영화들을 비롯해 <개그맨>(1988), <나의 사랑 나의 신부>(1990), <장군의 아들>(1990), <하얀 전쟁>(1992) 등도 무척 빠져들어 본 영화이긴 하지만 지금도 난 괜히 10대 시절에 <올드보이>(2003)나 <살인의 추억>(2003) 같은 한국영화들을 만난 친구들이 부럽다. 말하자면 중고교 시절 나에게는 머리와 마음 모두를 움직이며 다가온 한국영화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중고교 시절을 막 보내고 만난 <게임의 법칙>(1994)은 굉장한 충격을 안겨줬다. 장현수 감독의 이전 영화이자 데뷔작인 <걸어서 하늘까지>(1992) 또한 당시 충무로에서 보기 드문 범죄영화의 감성을 보여줬다고 생각했는데 <게임의 법칙>은 사뭇 작정하고 달려가는, 그리하여 구조적으로 너무 여유가 없어 숨이 막힌다고 할 만큼 속이 꽉 찬 장르영화였다. 너무 난데없이 등장한 영화 같은 느낌을 줘서 오히려 홍콩 누아르의 한국어 버전을 보는 듯했다. 여의도 63빌딩을 배경으로 한 오프닝부터 거의 모든 홍콩영화의 오프닝을 장식하는 빅토리아 항구의 야경 같은 느낌을 줬고, 무엇보다 만남의 헤어짐, 배신과 충성, 상승과 하강의 리듬이 그야말로 재빠르고 꼼꼼하게 펼쳐졌다.

당시 핍박받던 한국 액션영화의 지난날을 떠올려보면 <게임의 법칙>을 전후해 기억해둘 만한 빛나는 순간은 몇몇 더 있다. <장군의 아들>이 발굴한 배우와 무술인력들은 실질적으로 <게임의 법칙>에 그대로 수혈됐다 할 수 있으며 가공할 다대일 대결을 펼쳤던 <테러리스트>(1995)의 박력도 놀라웠다. 최민수의 카리스마가 간담을 서늘하게 하던, 좁은 방에서의 액션 장면을 비롯해 불을 이용한 놀라운 액션을 보여줬던 <나에게 오라>(1996)도 꽤 인상적이었으며, 감각적인 촬영 기법으로 <비트>(1997)에서 정우성이라는 배우가 등장하던 순간은 바로 이 흐름의 정점이라 할 만하다. 그중에서도 <게임의 법칙>은 ‘도시 조폭’ 영화라는 점에서 <친구>(2001)를 전후한 일련의 조폭 영화들의 오래된 원전이라 봐도 무방하다.

사실상 이제 와서 생각하면 <게임의 법칙>은 쿠바에서 건너온 토니(알 파치노)의 승승장구와 추락을 그린 <스카페이스>(1983)에다 <영웅본색>(1986)과 <열혈남아>(1987)가 적절히 뒤섞인 카피본이나 다름없다. 지방 세차장에서 일하는 용대(박중훈)는 남자다운 삶을 꿈꾸며 태숙(오연수)과 함께 서울행 기차를 탄다. 주먹 세계의 대부인 유광천(하용수)을 만나러 갈 꿈에 부풀어 있는데 기차에서 만난 사기꾼 만수(이경영)에게 몽땅 털리고, 급기야 용대는 태숙을 포주에게 고작 200만원에 팔아넘기면서까지 유광천을 찾는다. 사기 행각 끝에 잡혀서 한쪽 다리를 절게 되는 이경영의 남루한 모습에서 <영웅본색>의 주윤발이 떠오르고, 멋지게 한탕 하고 사이판으로 뜨겠다는 ‘앞뒤 모르는 무식한 놈’ 박중훈의 무모함은 <열혈남아>의 ‘개같이 살기보다 영웅처럼 죽고 싶다’던 장학우와 자연스레 겹쳐진다. 그렇게 찬찬히 곱씹어볼수록 당시 명민한 시나리오 작가였던 강제규 감독의 놀라운 구성력에 감탄할 따름이다.

하지만 <게임의 법칙>이 빛나는 지점들은 이것이 한국이라는 토대 위에 서 있는 누아르 영화임을 명백하게 할 때다. 형사한테 총을 뺏은 용대는 그저 잘 보이기 위해 보스에게 총을 선물로 건넨다. 총격전이 난무하는 홍콩 누아르나 <스카페이스>와 비교하자면 지극히 현실적인 묘사다. 그로 인해 총이 배제된 나이트클럽 액션신 등 정두홍 특유의 탁월한 액션지도, 어찌 보면 이후 거의 모든 한국 액션영화들의 액션신을 독점하는, 거칠고 날것 같은 정두홍식 액션 연출이 단숨에 주류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물론 그 자체로 인상적인 장면들도 있었다. 다리를 못쓰게 돼 ‘제비’로 활동할 수 없게 된 만수는 남자들에게도 몸을 팔게 되는데 막 관계를 끝낸 남자(이 역시 당시의 무명배우 김해곤)가 “이제 더러워서 못하겠어. 때가 밀리잖아!”라고 투덜댈 때의 비루함은 그야말로 지긋지긋했다. 더불어 “나 버리면 죽일 거야!”라며 끊임없이 육두문자를 날리며 달려드는 오연수 캐릭터도 무척 신선했다. 물론 당대의 명장면으로 회자되는 마지막 공중전화박스 신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피눈물 한 방울까지 흘리는 박중훈의 명연기로 탄생된 마지막 신은 여타의 홍콩 누아르 영화들이나 <스카페이스>와 비교해도 충격적이고 서늘했다. 장르영화의 토대가 빈약한 충무로에서 기존의 지리멸렬한 여타 한국영화들에 대한 사형선고 같았다고 한다면 지나친 말일까. 

PS 1.
새삼 <게임의 법칙>의 화려한 크레딧에 놀라게 된다. 당시 무명의 시나리오 작가 강제규 외에 조감독으로 참여한 송해성 감독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고, 명필름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홍보마케팅 전문회사 ‘명기획’의 심재명 대표 또한 참여했으며, <장군의 아들>을 통해 본격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린 스턴트맨 정두홍이 실질적인 무술감독으로 데뷔한 첫 작품이 바로 <게임의 법칙>이다.

PS 2.
<게임의 법칙>은 박중훈이 퇴물 건달로 나온 최근작 <내 깡패 같은 애인>과 비교해보면 무척 흥미롭다. <게임의 법칙>에서 “회장님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습니다”라며 보스 앞에 무릎을 꿇던 박중훈이 <내 깡패 같은 애인>에서는 취업준비생인 정유미를 향해 “면접 때 무조건 꿇어서 사정하면 안 되냐?”고 순진하게 묻고, <게임의 법칙> 첫 장면에서 세차장 생활이 지긋지긋해 양택조 사장을 구타하고 서울로 떴던 그가 <내 깡패 같은 애인> 마지막 장면에서는 조직 생활을 청산하고 성실한 세차장 직원으로 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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