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겨울 나는 ‘인간 난로’를 만났다. 바로 임권택 감독님이시다. 현장에서 모두 감독님을 그렇게 불렀다. 추운 날씨에 작업을 이어가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그분의 섬세한 배려와 따뜻한 눈빛은 언제나 현장을 훈훈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임권택 감독님의 101번 째 작품 <달빛 길어 올리기>에서 인연을 맺게 되었다. 처음에는 임권택 감독님과 작업을 하게 되었다는 것만으로 영광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름 석 자 그대로 ‘임권택’이었으니까.
임권택 감독님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수많은 미사어구를 동원할 수 있겠지만 내게 기억되는 감독님은 그 어떤 말보다 ‘영화 그 자체’라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다. 임권택 감독님은 진정한 영화인이시고 그래서 그런지 그 현장에는 사심 없이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모여 있었다. 감독님은 애써 따뜻한 말을 건네시는 분은 아니다. 단지 그분이 보여주는 행동만으로도 가르침을 주셨고, 또 모든 현장의 사람을 아껴주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임권택 감독님과 작업하는 모든 사람은 그 존재감만으로 아랫목의 평안함과 안정감을 맛보았을 것이다. 그 덕에 작업 현장의 사람 한 명 한 명은 서로를 배려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좋은 영화인’으로 성장한다. 그런 현장에 머물면서, 나는 수도 없이 ‘난 참 복 받았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임권택 감독의 대본은 살아 있다. 감독님은 촬영이 끝나면 ‘이제야 시나리오가 끝났다’고 말씀하시는 분이다. 촬영이 진행되는 동안 나는 매일 대본을 받았다. 언뜻 배우에게 꽤 부담되는 일로 들릴 수 있다. 하지만 항상 배우와 소통하시면서 현장의 에너지가 묻어나도록 살아 있는 대본을 써서 감독님께서 직접 손에 쥐어주실 때마다 두려움보다는 설렘을 느꼈다. 아무 걱정도 할 필요가 없었다. 감독님께서는 언제나 나의 오감을 열어주셨고 역할에 몰입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셨기 때문이다. 하루는 세트장으로 날 부르시고는 의견을 물으셨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한 내게 감독님이 건네주신 것은 ‘은단’이었다. “우리 은단 먹고 머리를 맑게 하자.” 이 한 마디에 나는 웃고 말았다. 언제부턴가 잊혀가고 있던 그것을 본 순간 알 수 없는 향수를 느꼈고 그 엉뚱한 말씀이 나의 긴장을 풀어주시려는 자상함임을 알았기에 아이처럼 웃어버렸다. 임권택 감독님은 그런 분이다. 나의 걱정을 녹여주는, 또 배우 예지원을 배역에 녹여주는 그런 난로 같은 분이다.
얼마 전에 <달빛 길어 올리기>의 보충 촬영이 진행된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 소식을 듣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다시 그 현장에 돌아갈 수 있다는 것, 그래서 현장의 따뜻함과 멋진 영화인을 만나 즐거운 시간을 또 한번 만들 수 있다는 것이 마냥 기대된다. 이처럼 <달빛 길어 올리기>는 생각만으로 벅차 오르는 특별한 영화다. 지금까지도 배우로 살아왔지만 앞으로도 살아가야 할 배우의 삶에 대해 느끼게 해준 ‘삶의 체험 현장’이기 때문이다. 그곳을 임권택 감독님께서 만드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