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권택] 임권택과 나 ③ 내가 아는 유일한 세계의 거장

by.오정해(영화배우, 동아방송예술대학 조교수) 2010-08-05조회 1,066

감독님과의 만남은 말 그대로 한 편의 영화였다. 어릴 적부터 연기에 대한 강한 호기심으로 부모님께 연기자의 길을 가게 해달라고 했지만 어느 것 하나도 맞지 않는 여건 탓에 전라도의 특성상 가장 친숙한 우리 음악을 먼저 접하게 됐는데, 그것을 시작할 때 중간에서 만나게 될 연기자의 꿈이 숨겨져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어찌 보면 난 <서편제>라는 영화 속에 머물기 위한 준비를 참으로 오랫동안 해온 듯하다. 송화라는 극 중 인물의 삶을 연기 경험 없는 연기자의 분석으론 이해하기 힘들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선택한 소리 인생에 뒤로 돌아가기보다는 앞으로 걷는 길이 당연하다 여겼고, 그 안에 그 소리 안에 미쳐 또래 아이들보다 훨씬 앞선 삶의 힘겨움을 운명인 듯 자연스레 받아들였다. 그 길 끝에 <서편제>를 만났고, 임권택 감독님은 나를 그 영화 속 송화로 만들어주셨다. 돌이켜보면 영화가 개봉된 후 받은 사랑도 엄청났지만 아니 지금도 이어지고 있지만 촬영 중에 느낀 행복감과는 비교도 안 될 듯싶다. 연기도 모르고 영화도 모르고 영화 시스템 전문용어 하나 모르는, 말도 안 되게 볼품없는 촌스러운 아이가 의지할 곳이란 그저 날 배우로 봐주시는 임 감독님 외에는 없었다. 처음 뵌 감독님은 그 어마어마한 명성을 뒤로할 만큼 참 편안하고 인자해 보이셨다. 아마도 그 명성만 좇아온 배우가 아니었기에 내가 겁 없이 편안하고 귀여운 분이라 느꼈는지도 모른다. 감독님은 크게 화를 내시지도 않았고, 한 장면 한 장면 촬영할 때마다 이것저것 물으시고, 확인하셨고, 그러고 난 후 난 마술사의 손에 이끌리듯 그분이 이끄시는 대로만 따라갔다. 그러는 동안 난 송화가 되어 있었다.

그 인연을 시작으로 <태백산맥> <축제> 그리고 10년을 훌쩍 넘긴 후 다시 <천년학>으로 감독님을 뵌 것이다. 그리고 <천년학> 속에 사랑을 품는 송화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는 나이에 자연스레 그 작품을 만났다. 첫 영화도 그랬듯 늘 난 감독님께 해가 되지 않나, 조심스러운 마음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감독님은 그런 나를 영화 속에서만큼은 당당하게 해주신다. 그러곤 말씀하신다. “난 널 위해서 그 역을 준 게 아니라 내가 필요해서 널 쓴 거다”라고. 사실 지금까지 감독님께 맛난 식사 한번 대접해드린 적이 없다. 그런 죄스러운 마음을 표현할 때마다 감독님은 외려 더 부담스러워하신다. 단, 소리를 들려 드릴 때만큼은 무한 리필을 좋아하신다. 감독님의 100번째 영화를 하는 동안 난 작품에서 소리꾼의 이상세계인 득음의 경지 같은 세계를 경험했다. 해탈을 경험했고, 그 이상의 인간이 지닌 욕심 자루를 모조리 내려놓는 세상을 배우가 아닌 관객 입장에서 만날 수 있었다. 감독님은 그런 분이다. 촬영 식구 누구 한 사람도 소홀함을 느낄 수 없도록 따뜻함으로 이끄시는. 그러나 그 현장만 벗어나면 세상의 모든 때는 남의 얘기인 양 순수함으로 똘똘 뭉쳐 ‘난 영화밖에 모릅니다’를 외치는 귀여운 나의 아버지이시다. 그리고 내가 아는 유일한 세계의 거장 ‘임권택 감독’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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