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86년 3월 25일에 정릉의 지미필름 사무실에서 감독님께 처음 인사드렸더랬다. 대학을 갓 졸업한 감독 지망생으로서 <티켓> 연출부에 입문한 것이었다. 그로부터 스물다섯 해 동안 유무형의 가르침을 받으며 오늘에 이르렀다. 한결같이 작품을 만들고 계시는 스승 앞에서 염원과는 다른 길에 있는 제자로서 송구함을 떨치지 못하는 일말고는 늘 같은 성정이었다. 염원과 다르다고 했지만 내 나름의 현재를 견지하는 일도 요소요소에서 스승의 은혜에 힘입은 바가 결정적이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으니, 달리 형용할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는 스승과 제자다. 그렇게 25년을 맞고 있기에 스승에 관한 회고에 이르면 다기했던 일과 그에 따른 감상이 무수할 수밖에 없는데, 한 번도 이를 글로 옮겨본 일이 없다. 쓰려니 조심스럽기만 하다.
처음 연출부가 돼 <티켓>을 찍을 때에는 감독님과 직접 대화를 나눈 적이 많이 잡아도 열 번 안쪽이었다. 그때 속초의 촬영현장에서 처음 받은 지시가 노래 한 곡 하라는 것이었다. 선창가 술집 촬영을 마치고 어른들이 마주 앉은 자리였다. 음치 중의 음치인 나에게 주어진 그 청을 떠올리면 지금도 진땀이 날 지경이다.(그 오래 후에 나는 전문가의 조언에 따라 애창곡 하나를 정해 수백 번을 불러댄 끝에 노래방 출입을 스스럼없이 하고 있다.) 소통의 첫 단추가 그랬던 것처럼 이후에도 늘 어렵고 조심스러웠다. 그렇다 해도 만나 뵈면 가슴이 따뜻해졌다. 그렇게 스물 몇 해가 흐른 것이다. 그 옛날 지방 촬영이 끝나면 손수 운전해 연출부들을 일일이 동네마다 거쳐 귀가시키셨다. 운전면허도 없이 뒷자리에서 곯아떨어졌던 우리가 얼마나 송구했겠는가. 작품이 뚝 끊어진 제자를 위해 K모 감독에게 청을 넣어주신 일, 스승의 특정 작품을 리메이크해보고 싶다는 외람된 제자의 뜻을 용인해주신 일, 제자가 인하대학교에 임용되었다는 소식에 앓던 이를 뺀 바와 다름없다며 기뻐하셨던 일들을 어떻게 쉬 잊을 수가 있겠는가.
감독님께서는, 잘 알려진 것처럼, 인본에 대한 쉼 없는 천착으로 인간사의 면면을 노정시키는 작품을 계속해오셨다. 스승의 이러한 작품 경향은 실제 삶에서의 금도의 설정과 이의 실천을 위한 구도자적 일상성에 토대하고 있다. 그에 더해 끊임없는 탐구열은 누구도 흉내내지 못할 만큼 강렬하시다. 인정되는 이의 이야기라면 몇 날이고 경청하신다. 그런 점이 스승의 현존하는 건재의 바탕이라고 감히 평해본다. 건강하시길 바랄 뿐이다.
전주영화제 기간과 겹친 <달빛 길어 올리기> 마지막 촬영 현장에서 나는 모처럼 스승께 응석 같은 하소연을 했다. “감독이라는 호칭이 민망할 때가 있습니다. 영화 못한 지가 언젠데….” “…김 감독, 대학교수는 아무나 하는 건가?” “그렇긴 합니다만….”
그리고 잇지 못했던 말을 스승께 마저 드리고 싶다. “저도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꼭 제 영화를 보여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