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긴 시간 임권택 감독과 인터뷰한 적이 있다. 끈질기게 물어보았다. “그때 이것은 어떤 결정이었습니까?” 항상 같은 방식으로 대답을 했다. “나는 생각나 지 않습니다.” 거기 머물지 않으려는 오로지 벡터뿐인 활동. 자리가 없는 힘. 차라리 언제나 사건을 기다리고 있는 시간(들)이라고 부르고 싶은 영화들. 무엇을? 새로운 가능성. 이 차원과 저 차원을 연결하는 선. 그 선 위를 임권택은 아슬 아슬하게 타고 넘어간다. 그러므로 임권택의 영화를 펼치는 힘은 모험의 기록이다. 하지만 낭만적으로 상상하지 말 것. 이 모든 것은 전후(戰後) 한국이라는 유례없는 근대사 안에서 진행된 것이다. 1960년 그해 희망의 봄과 1961년 그해 절망의 늦봄. 박정희의 시대. 반공 이데올로기와 근대화의 폭력적인 변증법. 일일이 셀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정치적 사건. 1980년 세 번째 봄. 그리고 피. 정치의 계절. 1987년 초여름. 작은 승리. 올림픽. 1990년. 김대중. 21세기. 노무현과 이명박이라는 두 개의 선택. 그걸 구경한다는 것과 그 안에서 산다는 것은 다른 문제다. 임권택의 영화는 제도 바깥으로 나온 적이 없다. 말하자면 법과 자본 안에서 임권택은 영화를 만들었다. 창조의 표면. 그 아래 놓인 역사라는 조건
<족보>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라
하지만 나는 임권택(의 영화들)을 박물 관에서 고고학적인 유물을 다루듯이 설명하는 것에 결사적으로 반대할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그 하나 는 임권택의 영화(들)은 아직 충분히 설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전히 오류가 기다리고 있다. 많은 비평가가 임권택 이 <만다라> ‘이후’ 발견된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건 잘못이다. 나는 <족보>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갈 뿐 아니라 1960년대에 만들어진 그의 영화들에 대해서도 똑같은 중요성을 가지고 다시 설명하고 싶다. 이것은 전통적인 작가주의의 오류를 반복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여기서 위치라는 문제를 제기하고 싶다. 누가 말하는가, 대신 어디서 말하는가를 놓고 영화 안의 위치가 각각의 고유한 대상으로 활동하는 방식을 존중하려고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각각의 고유한 세계가 각자가 놓인 역사 안의 제도, 산업의 구도, 시스템 안의 불연속, 자본의 계열, 강제적인 통일성, 각 시기의 특이한 질서, 차라리 토픽이라고 부르고 싶은 절단면, 던져진 제한적인 자율성, 혹은 의존을 검토하고 그 안에서 임권택(의 영화들)이 어떻게 등록되었는지를 물어보기 위해서다. 나는 이것을 상투적인 진화론적 곡선을 따라가는 일반적인 목적론의 기획이나 예술적인 은유에 그쳐서는 안된다고 생각 한다. 임권택(의 영화들)은 1961년에 시작해서 2010년에 이르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면 안 된다. 나는 차라리 임권택과 영화들의 자리를 바꾸고 싶다. 그래서 각 영화가 놓인 역사의 문턱, 그것들이 어떻게 그것을 건너가면서 탈바꿈했는지를 질문하고 그 안에서 한국영화사에 관한 위상학의 주석이라고 부를 만한 것을 해내야 한다. 1960년대. 장르들. 사극. 액션 다찌마와리. 멜로드라마. 만주웨스턴. 스파이. 무국적 무협활극. 심지어 (공포) 입체(유사3D)영화. 아직 텔레비전이 도착하지 않은 한국영화의 황금시대. 1970 년대. 무엇보다도 결단. <잡초>. 시네마스코프. 미장센. 새마을운동. 전통. 우수영화(라는제도). 박정희의 시간. 1980년대. 롱 테이크. 로드 무비. 베니스영화제. <씨받이>. 1990년대. 태흥영화사. 장르와 작가. 갑작스러운 성공. <장군의 아들>과 <서편제>. 비평의 담론(들). 21세기. 세계영화제들. 그리고 세계라는 네트워크 안에서의 ‘코리안’ 시네마들. 하지만 스스로 보존되는 임권택이라는 술어적 존재론.
그러므로 앞선 설명에 이어지는 두 번째 이유. 임권택을 하나의 전체로 설명하는 일을 피해야 한다. 던져진 시간과 그 앞에 놓인 영화 사이의 연속성. 제도적 환경과의 연계. 물론 이 모든 일이 엄밀한 조건 안에서만 진행된 것은 아니다. 그러 나 임권택은 매번 이 모든 조건을 받아들였고, 그 안에서 자기의 고유한 힘을 갖게 하는 내밀한 질문을 매번 새롭게 던졌다. 수동적 매번과 능동적 매번. 둘 사이 의 영화라는 전략. 그러므로 임권택의 영화를 보는 두 가지 방법이 여기서 나온 다. 하나는 물론 순서대로 보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일부분만을 설명할 수 있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갑자기 단절을 경험하고, 동일한 층위에서 자리매김된 것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갑자기 새로운 방식으로 관계를 맺고, 그 안에서 드러내놓고 반복되었던 것들이 어느 순간 사라져버릴 것이다. <두만강아 잘 있거라>에서 <망부석> 사이. <십년 세도>에서 <나는 왕이다> 사이. <요화장희빈>과 <돌아온 왼손잡이>. <황야의 독수리>에서 <아내들의 행진> 사이. <둘째 어머니>에서 <왕십리> 사이. <짝코>에서 <만다라> 사이. <씨받이>에서 <개벽> 사이. <서편제>에서 <춘향뎐> 사이.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말하자면 영화들의 ‘사이’ 안에서 경험되는 한국영화사의 시간. 부분 안에 담겨 있는 전체. 그런데 그 전체는 피라미드가 아니다. 말하자면 ‘사이’의 영화. 만일 당신이 한국영화사의 제도에 관해서 잘 알고 있으며 임권택이 활동한 시기에 만들 어진 영화에 대해서 충분히 안다고 할지라도 왜 임권택이 당신의 지식의 대상이 되지 않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임권택은 아무리 커다란 성공을 거두어도 언제나 그 안에 담겨 있는 사소한 실패로부터 다음 영화를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새로운 영역, 다른 방식으로 결합되기를 기대하는 낯선 초점들의 집 합, 말하자면 숨겨진 반복 속에서 이루어 지는 가능성을 찾는다. 말 그대로 잘 알고 있는 임권택 안에 들어 있는 낯선 임권택. 현재적 자기 안의 잠재적 자기. 이미 와해된 전체. 임권택은 계속 이동하고 있다. 피라미드는 자기 자리에 머문 자들 만이 지을 수 있다. 임권택은 자기 자리에 머무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는 자꾸만 이동한다. 그런 다음 자기가 머물고 있는 자리 바깥을 자기의 자리라고 생각한다.
임권택의 자서전에서 시작하라
나는 여기서 임권택의 영화를 보는 두 번째 방법을 제안하려고 한다. (내생각에) 임권택 영화에 관한 가장 좋은 입문은 <취화선>이다.이 영화는 그 자신의 (물론 종종 희미하게 서명을 한 다음 침묵과는 다른 그 어떤 중얼거림처럼 느껴지는 무언으로 자신을 출현시키고 있는) 자서전이다. 이 말을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임권택은 장승업이 아니다. 그러나 두 예술가 사이에는 공명의 울림이 있다. 같은 소리가 난다고 해서 동일한 악기는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 다른 예술을 같은 방법으로 연주하고 있다. 차라리 예술과 삶의 카탈로그라고 부르고 싶은 프로그램. 그런 다음 두 개의 ‘사이’를 배치 해보자. <잡초>와 <만다라>. 이것은 관례적인 방법을 따르는 것이다. 대신 그 둘 사이에 환경의 순환이라고 부를 수 있는 내부의 배치를 설정하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1969년에서 71년에 이르는 3년간 의 기적과도 같은 21편의 영화. 이 영화 들 없이 ‘사라진’ <잡초>는 앞의 영화들 사이와의 관계를 카오스로 만들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만다라>를 새로운 시작 으로 놓는 대신 하나의 끝으로 배치하고 1977년 <족보>에서부터 3년간을 이질 적인 리듬 사이에서 이루어진 하나의 블록으로 놓고 싶다. 물론 이것은 주기적인 반복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리듬에 따라 활동하는 중이다. 주의할 점. 두 개의 블록 사이를 동일하게 구성하면 안 된다. <족보> 이전의 영화는 서로 다른 상호 배치의 방법으로, 그리고 <족보> 이후의 영화는 환경 아래 놓인 내부 배치의 구도로 자리 잡은 다음, <만다라> 이후는 임권택 아래 하부 배치를 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방법 사이의 차이가 영화 사이의 우열을 정하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임권택에게 배치는 활동이다. 나는 그 안에서 어떤 의도나 의식적인 배치가 이루어졌 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임권택이 가장 경멸하는 예술가의 태도는 바로 그렇게 의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그가 따르려는 것은 주어진 환경과 영화 사이의 대위법이다. 그는 오로지 그 사이에서 그 둘을 중재하고 그 안에서 화음을 만들 어내려는 노력을 하는 중이다. 일렬로 놓인 <개벽>과 <장군의 아들>과 <서편 제>. 그러나 동일한 것을 <장군의 아들>과 <서 편제>와 <태백산맥>으로 놓을 때의 리듬 의 차이. 그것이 단지 토픽의 데쿠파주의 차이라고 단순하게 말할 수 있을까? 어쩌면 이 모든 설명이 은유적이라고 생각할 지 모른다.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임권택은 제멋대로이고 불규칙한 세상의 리듬과 영화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물론 지나치게 가까이 다가가면 영화는 부서질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너무 멀리 떨어지면 영화는 구경꾼이 될 것이다.임권택은 그 둘 사이의 중간을 찾기 위해서 끊임없이 이동한다. 임권택의 활동은 그 이동의 표현이나 다름없다.
이때 당신이 준비해야 할 태도. 임권택이 새로운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갑자기 이전까지 우리가 준비한 모든 계열이 일제히 분산되고 그 안에서 새로운 영화의 자리를 따라 다시 배치된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새로운 분할과 그 안에서 우리의 결정을 망설이게 만드는 새로운 요소들과의 만남. 말하자면 끊임없이 활동 중인 대차 대조표. 이때 새로운 힘의 활동을 새로운 규칙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어느 쪽이 새로운 힘인지, 어느 쪽이 부차적인 매개의 변수인지 단정 지으면 안 된다. 그 모든 것은 언제나 동시에 나타나서 함께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공존의 불순물들. 그러나 불규칙적인 규칙 없는 예술이 가능할까? 일순간에 이루어진 공존. 그 안에서 무엇이 새로운 규칙이며 무엇이 낡은 요소 인지를 가늠하고 그런 다음 그것들이 어떻게 함께 새로운 영화의 성립을 가능하게 만들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이를테면 하나의 이야기로 이루어진 두 편의 영화 <서편제>와 <천년학> 사이에서 남은 것과 사라진 것. 반복과 차이. 나는 임권택의 영화를 보면서 끊임없이 뺄셈과 덧셈을 한다. 무엇이 거기에 더해졌는가. 무엇을 버렸는가. 지금은 그것을 반대로 셈할 차례다. 100번째 영화로부터 거슬러 올라가면서 셈하기. 그때 그 셈은 동시에 한국영화가 자기의 모습을 갖춰가는 모습의 또 다른 기록이기도 할 것이다.
매년 새해가 되면 나는 임권택 감독 댁 에 세배 가는 것으로 그해를 시작한다. 이 집 안방에는 액자가 하나 걸려 있다. 그 액자는 내가 처음 인사를 하러 갔던 1987년부터 보아온 것이다. 그 액자에는 단지 한 글자만이 쓰여 있을 뿐이다. ‘무(無)’. 이 보다 더 임권택의 예술적 야심을 잘 설명할 수 있는 말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