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월한 기술력을 갖춘 엔터테이너, 이형표가 지다 영화평론가 김종원, 지난 4월 26일 타계한 故 이형표 감독을 돌아보다

by.김종원(영화사 연구자) 2010-07-08조회 5,301

이형표(李亨杓) 감독은 해박한 영화이론과 영어 실력 그리고 다큐멘터리로 다진 촬영 기술과 프로 못지않은 그림 솜씨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좀처럼 뽐내지 않은 사람이었다. 대인 관계에서도 유머를 즐기며, 머뭇거리는 몸짓보다는 간단명료한 의사 표시를 좋아했다. 또한 그는 자유분방한 페미니스트였다. 80줄에 들어선 나이에도 청년처럼 청바지를 입고 다녔으며, 2001년 영상물등급위원회 영화심의위원으로 나갈 때는 손수 끓인 커피를 보온병에 담아 와서 여성위원들에게 먼저 따라주는 서비스로 심의시간을 즐겁게 했다. ‘80노익장의 청바지’ 와 ‘이형표의 모닝커피’는 그의 자유분방함과 페미니스트로서의 면모를 드러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는 평소 옷깃을 여미는 격식보다는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연스레 소매를 걷어올 리는 차림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그런 만큼  그에게는 남을 편하게 만드는 서민적인 소탈함이 있었다. 스스로 어른 대접을 받으려 하지 않았고, 자리의 중심에서 늘 한발 옆으로  물러서는 겸양을 보였다. 언제나 미소를 머금고 후배들을 다정다감하게 보듬어준 큰 형님같은 존재였다. 

다큐멘터리로 익힌 테크놀로지

이형표는 1922년 3월 23일 황해도 안악(安岳)에서 태어났다. 전매국에 다니는 지주인  아버지의 보살핌으로 남부럽지 않게 자랐으나, 여섯 살 때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면서 가족과 함께 서울로 거처를 옮겼다. 서울의 의동소학교를 나온 후 7년 과정의 경성사범학교로 진학, 광복이 되는 해에 졸업했다가 이  학교가 국립 서울사범대학교로 개편되면서 영문과에 입학했다.

그는 중학교 때부터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가정교사가 되었다. 일자리를 구해  들어간 곳이 하필 이구영(李龜永)의 집이었다. 그는 일찍이 <쌍옥루>(1925) 와 <낙화유수>(1927) 등을 만든 한국영화 초창기의 감독으로, 단성사 선전부장을 지내기도 한 사람이다. 이런 인연이 그를 영화의 길로 가게 만든 계기가  된다.

그는 그림과 음악에도 소질이 있었다. 이미 중학 2학년 때에 오늘날의 국전에  해당하는 선전(鮮展,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는가 하면, 경성사범학교 합 창단을 이끌던 5년 선배 김순남(월북 작곡가)에게 발성법 등 기초를 배울 정도였다. 그는 이런 전력의 도움으로 한때 홍익대 미술학부 강사 생활을 한 적 이 있다. 

그는 대학 시절에도 아르바이트를 계속했다. 이때 미8군에서 발간하는 홍보지 <코리아 그래픽>의 편집 보좌역을 맡았고, 국제적십자사 도서관의 사서 일을 보았다. 그가 실리적인 생활영어를 익힐 수 있었던 기회였다. 이런 인연들 이 힘이 되어 대학을 나오자 반듯한 직장을 얻을 수 있었다. 그가 들어간 미국 공보원(USIS)은 6·25전쟁 후 수시로 변하는 전황을 세계 언론에 전하고 미군을 홍보하는 창구 역할을 했다. 그는 이곳에서 영화제작 보조관으로 근무하며 미국에서 만든 다큐멘터리나 홍보영화를 우리말로 번역하는 작업을 했다. 1952년에는 국제연합 한국재건단(UNKRA) 홍보고문으로 일했고, 그 이듬해 휴전과 함께 공보처 영화과로 옮겨 현상소  시설과 운영을 담당했다. 이때 대한영화사 사무장으로 새로운 소식을 전하는 <대한뉴스> 제작을 주관했다. 한국의 자연과 생활을  국내외에 알리는 <낙원 제주>와 같은 기록영화와 홍보영화를 만든 것도 이 무렵이었다. 이후 미국의 방송사 NBC TV 특파원을 지내고, 파라마운트영화사가 제작한 <휴전>의 조감독으로 활동하며 영화 선진국의 새로운 기술과 제작시스템을 익힐 수 있었다. 

그는 이와 같은 다큐멘터리 제작경험을 살려  1953년에 만든 문화영화 <위기에 처한 아이들>(흑백)과 <한국의 예술가들>(색채)이 에든버러영화제와 마닐라영화제에서 수상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신상옥이 알아본 그의 재능

미국의 최신 기재로 익힌 이형표의 테크놀로지는 오래가지 않아 그 가치를 알아본 신상옥  감독에 의해 활용되기 시작했다. 그가 신상옥의 연락을 받고 만나게 된 것은 그의 두 번 째 작품 <코리아>(1954)가 현상에 들어가는  시점이었다. 차기 기획에 대해 설명하는 가운데 김동인의 소설을 영화화할 생각이라며 뜻밖에 <젊은 그들>(1955)의 각색을 부탁했다. 

이 일은 <무영탑>(1957)의 시나리오 집필로 이어졌다.  일이 이렇게 돌아가다보니 아예 회사로 출근하게 되었다. 1958년 서울 태평로 조선일보 뒤쪽에 신필름이 있던 시절이었다. 이를 계기로 <동심초>(1959) 의 촬영감독을 맡는 한편, 조명·세트 등 기술 전반에 걸쳐 자문까지 하게 되었다. 나이는 신 감독이 네 살 아래였지만, 그들은 친구처럼 스스럼없이 지냈다.  하지만 남들이 있는 자리에선 신 감독에게 예의를 갖추었다.  이형표의 진면목이 드러난 것은 1961년 <성춘향>의 촬영감독을 맡으면서부터였다. 홍성기 감독의 <춘향전>과 함께 컬러 시네마스코프 시대를 연 이 영화가 나오기까지는 ‘대한뉴스’를 전후해 경험한 컬러영화 촬영이 큰 도움이  되었다. 

이런 가운데 그에게 첫 메가폰을 잡는 기회가 왔다. <성춘향>의 롱런으로 신필름이 한창 활기를 띨 무렵이었다. 하루는 신 감독이 “당신도 하나 할 때가 되지  않았느냐”며 <서울의 지붕 밑> 감독을 권했다. 그것도 김승호(한의사), 김희갑(복덕방 영감), 허장강(관상쟁이), 신영균(한의사의 아들), 최은희(딸), 김진규(산부인과 의사) 등 내로라하는 골든 캐스트. 그가 받은 이 선물은 그동안 의 노고에 대한 신 감독의 보답인 셈이었다. 그가 서른아홉 살이 되는 해였다.  조흔파의 소설 <골목안 사람들>을 원작으로 한 <서울의 지붕 밑>은 전통과 근대의 대립 속에 살면서도 정겨움을 잃지 않고 화해하는 도시 서민들의 모습을  그린 풍자극이다. 게딱지 같은 지붕들이 맞닿은 서울 한복판의 골목 안에서 벌어지는 노인들과 젊은이들의 갖가지 진풍 경과 페이소스를 재치 있게 담아냈다. 명실 상부한 그의 대표작이다. 

이 영화에 이어 <대심청전>과  <아름다운 수 의>(이상 1962)를 비롯해 <말띠 여대생>  (1963),  <아름다운 눈동자>(1965), <너의  이름은 여자>(1969), <방의 불을 꺼주오>  (1970)와 마지막 작품인 <먼 여행 긴 터널>  (1986) 등 모두 87편의 극영화를 내놓았다.  그러나 2010년 4월 26일 88세로 작고할 때 까지 그의 ‘영화 인생 43년’을 마무리한 것은  그를 영화계로 이끈 신상옥 감독의 <겨울 이야기>(2004)의 시나리오였다.

<아름다운 수의(囚衣)>는 인습적인 가정과  주위 환경에서 오는 거부감으로 시달리던 여대생(태현실)이 친구의 약혼자(이상사)와  육체관계를 맺고 마침내는 유학에서 돌아온  제 약혼자 앞에 죽음으로 사죄한다는 내용이다. 당시 젊은이들의 사랑과 성의 풍조를 반영한 작품으로, 태현실이 매스컴의 주시 속에 데뷔했다.

<말띠 여대생>(1963)은 여자대학 기숙사를 중심으로 의기투합한 엄앵란, 최지희 등 말띠 그룹의 처녀들이 같은 말띠 사감(황정순)과 마찰을 빚으며 남학 생들과 놀아나다가 정상으로 돌아오는 경쾌한 청춘찬가이며, <아름다운 눈동자>는 스타 이력 11년, 출연작품 300여 편에 달하는 엄앵란이 처음 제 목소리 를 넣어 제3회 청룡상 여우주연상을 받은 홈드라마다. 순박한 강원도 시골 처녀 금분이가 서울에서 식모살이하며 겪는 애환을 웃음을 곁들여 차분하게 풀어나갔다.

<너의 이름은 여자>는 건축업자인 남편(김진규)이 불의의 사고로 성불구자가 되면서 대학생(백영민)과 욕정을 불태우던 아내(김지미)가 죄책감에 괴로워 하다가 차에 치어 죽는 한국판 <채털리 부인의 사랑>이며, <방에 불을 꺼주오>  는 화가인 남편(최무룡)에게 불만을 가진 아내(문희)가  외간남자와 하룻밤을 보낸 뒤 비참한 자신의 모습에 환멸을 느끼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이야기 이다. 두 편 모두 당시로서는 경고 수위에 이를 만큼 대담한 애정표현을 시도 했다.

승부에 초연한 낙관주의

이형표 영화의 특징은 낙관주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매사를 긍정적으 로 보려는 그의 낙천적인 성격과 결부된다. 물론 <아름다운 수의> <너의 이름 은 여자> 등 죽음으로 귀착되는 예외적인 경우가 있긴 하지만, 데뷔작인 <서울의 지붕 밑>은 말할 것 없고, <말띠 여대생> <아름다운 눈동자>나 <언니는 좋겠네>  (1963), <연애졸업반>(1964), <회전의자>(1966), <산에 가야 범을 잡지>(1969), <염통에 털 난 사나이>(1970), <맹물로 가는 자동차>(1974), <남자 가정부>(1979) 등 대부분의 영화가 이런 흐름을 유지하고 있다. 스스로 “내 작품의 70%는 코미디” 라고 언급 (신필름 관련 구술)했듯이, 희극은 그의 영화 세계를 형성하는 활력소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이런 면모는 제작자들과의 관계에서도 엿볼 수 있다. 한마디로 그는 누구보다도 제작자를 편하게 해주는 감독이었다. 요구조건을 까다롭게 내세우거나, 필름을 낭비하지 않았으며, 촬영 기간을 짧게 잡음으로써 제작비를 절감케 했다. 아울러 임기응변의 센스와 시류에도 민감한 흥행 감각을 보여주었다. 가령 청춘영화 붐이 일면 <말띠 여대생> <연애졸업반>(1964)과 같은 젊은이의 취향으로 대응하고, 하이틴 영화가 성행할 때는 <너무너무 좋은 거야> <푸른 꿈은 가득히>  (이상 1976) 등을 제시했다.

이뿐 아니라 성룡의 <취권(醉拳)>(1979)이  서울의 극장가를 휩쓸자 그 아류인 <애권(愛 拳)>(1980)을 내놓아 권격 코믹영화 붐을  선도하기도 했다. 그가 만든 이런 부류의 영화만도 <요사권>(1980), <신애권>(1982),  <소애권>(1983) 등 네 편이나 된다. 그러나  아쉽게도 무대를 ‘만주 벌판 비슷한 곳’으로  설정할 만큼 전반적으로 완성도가 떨어졌다.  그의 사람됨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세속적인  명예에 집착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영화감독 위원회 부위원장(1980)직말고는 변변한 상 이나 직책을 맡은 적이 없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이형표에게서는 치열한 작가정신 이나 승부욕이 아쉬웠다. 이는 영화를 오락 의 수단으로 여기는 그의 영화관과 직결되는  한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각본, 촬영, 편집, 미술, 등 거의 손 안 댄 분야가 없을  만큼 다재다능한 전천후 영화인이요, 멋을  추구한 영원한 청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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