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28일 저녁, 미국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에 자리 잡은 하버드 필름아카이브 앞에는 꽤 길게 줄이 늘어섰다. 7시에 시작하는 영화를 보기 위해선 줄이었는데 결국 50명 남짓한 사람이 자리를 얻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이날 상영한 영화는 바로 <마더>. 뉴욕 브루클린을 거쳐 날아온 봉준호 감독이 직접 참석하는 행사도 같이 열렸다. <마더>는 봉 감독이 미국을 순회하며 관객과의 대화 행사를 가진 뒤 대도시를 중심으로 개봉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이곳 관객들은 아직 볼 기회가 없었음에도 이날 행사는 개봉 전부터 한껏 뜨거워진 관심을 증명하기에 충분했다. 영화 시사 후에 이어진 관객과의 대화는 쏟아지는 질문으로 10시가 지난 후에야 끝났고, 3월 6일까지 이어진 회고전 ‘봉준호: 장르의 즐거움과 두려움(Bong Joon-ho: The Pleasures and Terrors of Genre)’의 다른 작품들 역시 북적이는 관객들로 성황을 이루었다.
이처럼 봉준호나 박찬욱 같은 동시대 한국 감독들이 보스턴 시네필 사이에서 인지도 높은 스타로 받아들여진다는 점 못지않게 흥미로운 사실은 학문적 분야에서도 한국영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는 것이다. 하버드대학교 영화학 대학원 박사과정 학생들을 위한 워크숍 수업의 학기 첫 토론 과제로 김기영 감독의 <하녀>가 채택된다든지, 역사학이나 문학 학제를 중심으로 운영되던 한국학 과정에서 한국영화에 대한 간학제적 접근을 시도하는 대학원생이 늘어난다든지 하는 모습에서 변화는 쉽게 감지된다. 이러한 학계의 관심을 상 징적으로 보여주는 행사가 바로 하버드대학교 한국학연구소(Korea Institute)에서 주관해온 한국영화 상영회다. 지난해 가을학기부터 시작된 이 행사는 그 첫 시리즈로 영상자료원의 김기영 감독 컬렉션을 선택했다. <하녀>가 꽤 잘 알려진 데 비해 <고려장>이나 <충녀> 같은 영화는 여전히 이곳의 많은 이에게 낯선 작품이다. <고려장>의 인공적이고 폐쇄적인 공간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오고 갔으며, <육체의 약속>에 대해서는 호스티스 멜로라는 낯선 장르의 ‘여성 수난’ 문법에 거부감을 나타내는 이들도 있었고, <충녀>의 카메 라워크나 편집에서 드러난 래디컬한 실험성에 매료되었음을 밝히는 관객도 있었다. 올해부터 명칭을 ‘ Korean Cinémathèque ’로 변경한 이 상영회는 보다 간학 제적이고 심도 있는 토론이 오갈 수 있도록 체계를 가다듬었다. 필자가 선별한 작품들을 바탕으로 한국학연구소 드미트리 미로넨코 연구원과 필자가 공동 프로그램 코디네이터를 맡아 진행한 봄학기 시리즈는 ‘Peninsular Genderscapes on Film’이라는 타이틀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영화에 대한 사 회·문화사적 접근을 시도했다. 1958년작 <지옥화>부터 1975년작 <영자의 전성시대>까지 총 10편의 작품을 젠더, 국가, 모더니티 등의 화두 속에서 살펴보고자 했으며, 영화학·한국학·미국학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자가 각기 지 정토론자를 맡아 상영 후 약 1시간씩 토론하는 형식으로 진행했다. 석 달 동안 10편을 소화하는 다소 빡빡한 일정에도 연구자뿐 아니라 시네필이나 한국문화에 관심 있는 일반 관객까지 함께 한국영화에 대해 유익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이 큰 소득이 었으며 그중 일부는 거의 매번 참석하기도 했다. 김기영과 1950~70년대 한국영화를 탐사한 코리안 시네마테크의 다음 시리즈는 한국의 독립영화로, 1970~80년대의 초기 작품부 터 최근의 화제작까지 살펴볼 수 있게 준비 중이다. 이에 더해 한국학연구소 주최로 가을학기 중에 일제강점기 조선영화에 관한 학술행사까지 열 계획이니 바야흐로 한국영화 는 시기와 장르를 불문하고 전방위적인 관심 사가 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처럼 한국학연구소의 행사들이 지역학의 맥락에서 간학제적인 교차점을 만들어내고 있다면, 하버드 필름아카이브(HFA)는 학제 와 그 바깥을 매개하는 시네마테크의 역할을 하고 있다 하겠다. 1979년 하버드 미술도서관(Fine Arts Library) 산하 아카이브로 설립된 이곳은 대학 산하 필름아카이브임에도 1만4000여편의 필름을 소장한, 뉴잉글랜드 지역을 대표하는 아카이브다. 자체 소장 작뿐 아니라 FIAF 네트워크를 통해 다양한 초청전을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으며, 2009-2010학년도 1년 동안에만 봉준호, 차이밍량, 캐스린 비글로 등 30명 이상의 초청자가 다녀갔다. 학생이나 연구자 외에도 지역의 시네필, 비평가, 영화인으로 이루어진 두터운 고정 관객층을 확보하고 있어 평일 저녁에도 높은 좌석점유율을 자랑한다. 2010년 봄 학기가 끝난 지금은 존 포드를 ‘고전기(Classic Ford)’ ‘후기(Late Ford)’ 그리고 ‘전시기(Ford at War)’로 분류해 2월 부터 6월까지 이어 상영하는 ‘존 포드 회고전’ 3부작을 진행 중이다.
다음은 5월 12일 데이비드 펜들턴(David Pendleton) HFA 프로그래 머와 인터뷰한 내용이다.
HFA의 프로그래밍에서 중심이 되는 철학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 다른 종류의 영화 이미지, 이를테면 예술적 양식이나 대중적 양식 혹은 역사적 자료로서의 이미지를 ‘극장’이라는 공간을 통해 체험하게 한다는 데 의의를 두고 있습니다. 특히 ‘큰 스크린’을 다른 관객들과 공유하는 체험은 여전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프로그래밍 하는 데 HFA만의 특징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크게는 미국 내 타 아카이브와의 네트워크를 통해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경우 가 많습니다. 뉴욕의 MoMA와 샌프란시스코의 PFA, 그리고 덧붙이자면 로스앤젤레스의 UCLA 정도가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크다고 할 수 있는데 HFA는 특히 MoMA와 좋은 협력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역 관객의 취향과 필요에 따라서도 프로그램의 방향성이 결정되는 편입니다. 학 생뿐 아니라 보스턴-케임브리지 지역의 논픽션 영화인들이 HFA의 주요 관 객층입니다. 그래서 역사적 이슈들을 다루거나 젊은 학생들에게 고전영화를 보급하기 위한 프로그램을 많이 배치하고 있습니다. 스턴버그의 <The Docks of New York>(1928)을 보기 위해 그 영화를 처음 보는 관객들이 극 장을 꽉 채웠을 때의 희열을 잊지 못합니다.
대학 아카이브로서의 정체성이 끼친 영향은 무엇인지요?
아무래도 하버드가 지역학이 활성화된 곳이다 보니 다양한 지역학의 이슈와 이곳을 찾는 여러 방문 예술가, 방문 학자와 의 교류가 좋은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또 지 역학 연구소들의 도움으로 많은 영화인을 초청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봉준호 감독도 그런 경우인데, 예술영화와 장르영화의 경계를 넘나드는 그의 영화 세계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올해 하반기의 주요 프로그램을 추천해 주십시오.
우선 지아장커 감독을 초청하는 회고전이 열릴 예정이고, 9월에는 파졸리니 회고전을 열 겁니다. 이란 출신으로 고국에서 추방당해 미국에서 작품 활동 중인 아미르 나데리 감독 초청전과 보스턴 주민으로서 민족지영화 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는 로버트 가드너 감독전 도 계획되어 있고, 겨울에는 MoMA와 공동 으로 바이마르 영화 회고전을 열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보스턴 주민인 프레드릭 와이즈먼 감독의 80세 생일을 기념한 회고 전 요청이 많아서 내년 1월쯤 진행하게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