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얄개>(석래명, 1976)부터 <친구>(곽경택, 2001)까지, 1970년대 후크 교복을 입고 교정을 누빈 학생들을 다룬 영화는 꾸준히 개봉됐지만 교복자율화 시대, 즉 1980년대의 풍경을 담은 영화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조근식 감독의 2002년작 <품행제로>는 1980년대를 유쾌하고 발칙하게 그려낸 영화로 2002년 12월 개봉해 이듬해 3월까지 56만 9421명(영진위 집계 기준)의 관객을 동원한 작품이다.
<품행제로>의 ‘중필’은 류승범이 아니면 도저히 소화하기 힘들 것 같은 캐릭터이지만 사실 감독은 애초부터 류승범을 염두에 두지는 않았다. 시나리오를 준비하던 1999년에는 중필(류승범 분) 역으로 박해일을, 수동(봉태규 분) 역으로 류승범을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제작 일정이 늦춰지면서 박해일은 다른 영화를 준비했고, 조연으로 낙점됐던 류승범을 주연으로 생각했으나 그마저 드라마와 다른 영화 스케줄 등으로 어려운 상황에 놓인다. 조근식 감독은 류승범을 데려오기 위해 그의 형 류승완 감독을 포함해 그와 그의 주변을 괴롭혔다. 그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잘 통하지 않아 최후의 방법으로 진심을 전하기 위해 연애편지 쓰는 심정으로 류승범에게 편지를 썼고, 며칠 후 류승범에게 영화에 출연하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당시 류승범은 장준환 감독의 <지구를 지켜라>에 마음이 많이 가 있었던 것 같다”며 섭섭했던 당시 심정을 토로했다. 이에 류승범은 “작품을 만나는 것은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신하균 선배가 <지구를 지켜라>에 간 것도, 내가 <품행제로>를 찍은 것도 모두 운명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답하며 감독을 ‘위로’했다.
<품행제로>는 영화에 삽입된 음악을 포함해 롤러장, 학교 주변의 풍경 등 1980년대의 공기를 그대로 재현했을 뿐 아니라 ‘억압과 자유’로 대변되는 당시의 사회 분위기를 너무 묵직하지 않게, 유쾌하고 상큼하게 다룬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 시기를 배경으로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었느냐는 질문에 조근식 감독은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상업영화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몽정기>(정초신, 2002)가 성공하면서 제작에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면서 “이 영화를 준비할 당시만 하더라도 문화계 저변에서 1980년대를 ‘독재’와 ‘저항’이라는 테마로 요약했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80년대의 정서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 시기를 반드시 무거운 소재만으로 표현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고 싶었다”라고 당시의 기획 의도를 밝혔다.
이 영화를 촬영하는 내내 조근식 감독과 류승범은 캐릭터 조율 문제로 마찰을 빚었다고 했다. 류승범은 고교 시절 그다지 밝지 않았던 성격을 떠올리며 ‘중필’이라는 캐릭터를 어둡게 그려내고자 했고, 조근식 감독은 류승범이 ‘중필’을 통해 보여주고자 한 경계심, 낯가림 등 분석적인 부분들을 제거하고 싶었다고 고백했다. 일례로 극중 ‘중필’이 기타를 치며 ‘스잔’을 부르다 혼자 화를 내는 장면을 촬영하는 날 류승범은 감독과 크게 마찰이 있었고, 그 연기는 진짜 감독을 향해 화를 낸, 진정한 매소드 연기였다고 밝혀 좌중을 웃게 했다. 조근식 감독은 “배우가 자기 본성을 억누르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며 “류승범이 분명 자신의 느낌에 따라 ‘작두’만 타면 관객이 만족할 것이라 생각했고, 촬영이 진행되면서 ‘중필’에 대한 느낌이 서로 잘 맞아들어간 것 같다. 결국 류승범이 자신이 가진 개성을 잘 펼쳤다”고 류승범에 대한 신뢰를 보였다.
영화의 기운 만큼이나 관객과의 대화는 시종일관 유쾌하게 진행됐다. 이어진 관객들의 질문에도 조근식 감독과 류승범은 성심껏 답했고, 개봉한 지 8년이 지난 영화를 다시 보기 위해 모인 관객들에게 거듭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마지막으로 류승범은 “나 자신은 시간이 흐르면서 나이를 먹지만 ‘항상 변하지 않는 80년대의 중필이’가 궁금하곤 했다. 요즘 사람들은 바쁘게 지내는 것에만 익숙하기 때문에 과거를 돌아볼 시간이 별로 없는데, 2010년 늦은 겨울 감독, 배우와 함께 이 영화를 다시 봤다는 추억을 갖고, 가끔 그 추억을 꺼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며 소감을 밝히고 관객과의 대화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