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김수용 감독님의 연출부 말단으로 들어가 조감독 생활을 시작한 것은 <물보라>라는 영화의 후반작업 때였다. 당시 제작진에서 그 작품이 감독님의 백 번째 작품이냐 아니냐를 놓고 서로 논쟁을 했을 만큼 당시로는 감독님의 영화연출 편수를 정확히 카운트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한 작품을 이미 만드셨고 당시도 한창 작업을 계속 하시던 때였다.
요즘의 내 나이가 당시의 감독님과 비슷한 때이고 내가 지금까지 겨우 열네 편의 영화를 만든 것에 비하면 감독님의 필모그래피가 주는 커리어의 무게는 지금 막 영화현장에 뛰어든 풋내기로서는 상상이 가지 않는 것이었다.물론 당시와는 영화제작 환경이 다르다 해도 감독 데뷔 후 20여년 동안 매년 4~5편의 영화를 한 해도 쉬지 않고 연속해서 만든다는 것은 경이적인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어떻게 감독님은 그 많은 작품을 다 연출할 수 있었을까?
그것도 모두 일정수준 이상의 작품들이고, 많은 작품은 흥행에도 성공했으며, 그중 여러 편은 한국영화사에 길이 남는 주옥같은 명작이 된 영화들을….이런 의문은 감독님을 모시고 새 영화 촬영현장을 따라다니면서 이내 풀렸다. 감독님은 영화계에서 부지런하시기로 이미 정평이 나신 분이셨다.
지방 촬영 때면 언제나 아침에 가장 먼저 일어나 준비를 마치고 우리를 기다리셨고 우리가 허겁지겁 쫓아가면 벌써 다음 단계로 넘어가고 계셨다. 촬영도 조감독들이 진도를 미처 따라잡기가 힘들 정도로 부지런히 하셨다. 감독님의 연출작업은 간결했다. 깔끔한 스케치 그림으로 직접 작성하신 콘티는 군더더기나 억지스러운 것이 없다. 배우들에게도 최대한 재량권을 주어 연기를 맡겼다. 대신 연기자들이 편안하게 연기할 수 있도록 화목한 촬영현장 분위기를 만드신다. 그래서 특히 신인배우들이나 아역배우들이 위축되지 않고 맘껏 제 기량을 발휘하게 한다. 김수용 감독님은 캐스팅할 때도 스타 연기자에 크게 연연하지 않았는데 <갯마을>이나 <저 하늘에도 슬픔이> 같은 영화처럼 감독님의 영화 중 흥행에 성공한 영화들은 신인이나 아역배우가 주연을 맡은 작품이 많았다는 걸 감독님은 이미 경험으로 알고 계셨다. 스타가 아니면 안 된다고 기획이 엎어지고 투자가 취소되는 행태와는 다른 길을 가신 것이다. 거기에 더해 감독님은 새로 나온 책을 읽는 데도 누구보다 부지런하셨다.
학창 시절 문학청년이었던 영향으로 늘 많은 문학작품을 읽으셨고 거기서 발견되는 영감은 그대로 감독님의 새로운 영화소재로 연결되었다. 한국영화의 황금기라는 1960년대를 풍미한 문예영화붐을 김수용감독님이 이끌었다는 것은 이미 한국영화사의 정설이 되었다. 거기에 더해 김수용 감독님은 몸과 마음의 건강을 언제나 최상으로 유지하셨다. 담배는 전혀 안하셨고, 호주가이셨지만 술 때문에 흐트러진 모습을 한번도 본적이 없을 만큼 절제 하셨다. 100편이 넘는 영화를 만드시는 동안 여배우 손목 한번 잡은 일도 없을 만큼 스캔들 비슷한 일도 없으셨다. 그리고 주위에서 모두 부러워 할 만큼 화목한 가정을 꾸리셨다.
이런 것들이 모두 감독님께서 그 많은 작품을 만들 수 있게 한 것들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지금도 감독님이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으니 또 새 작품을 곧 시작하신다고 해도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