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용] 김수용을 기억하다 - 윤정희 우리 곧, 정신 번쩍 드는 영화 한 편 만들어 봅시다

by.윤정희(영화배우) 2010-03-15조회 1,189
윤정희

좋은 만남이란, 짧은 인생에서 가장 귀중한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김수용 감독님과 나의 만남은, 내 영화의 삶에서 영원한 동반자이자 변함없는 우정과 영화에 대한 끝없는 열정으로 나의 삶을 풍부하게 만들고 있다. 그것은 몇 작품에 제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한국영화사에서 선택된 중요한 작품과 함께 계속되어오는 자랑스러운 만남이다. 김 감독님과 함께한 첫 작품은 김승옥 원작 <무진기행>을 각색한 <안개>, 그러니까 1967년 나의 데뷔작품 <청춘극장>이 개봉한 같은 해였다. <안개>는 그 당시 젊은 세대들을 감동시킨 한국 현대문학사의 대표적인 소설을  김수용 감독이 새롭고 실험적으로 연출한 작품으로, 지금까지도 한국뿐만 아니라 외국에서도 사랑받는 자랑스러운 작품이다.

자기 세계가 뚜렷한 감독일수록 각자 작품을 만드는 스타일이 명백하다. 베르히만처럼 항상 같은, 가족과 같은 멤버들과 함께 마치 연극과 같은 압축된 공간과 시간 안에 드라마를 끌고 나가는 감독이 있는가 하면 브레송같이 논프로페셔널과 함께 이미지를 시적인 구성으로 드라마를 만들어나간 감독도 있다. 베르송 감독 앞에서는 배우들이 완전히 소품이 된다. 그와 달리 감독님은 마치 넓은 들판에 말을 풀어놓듯 배우들이 연기할 수 있는 세계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 그는 타고난 문학적 감성을 영상으로 풀어 그의 작품세계를 마음껏 펼쳐나간다. 그는 시대에 앞선 새로운 감각으로 영화언어를 구상하는 분이다. 현장에 나오시기 전, 그의 머릿속에는 그날 찍을 콘티가 거의 완벽하게 구성되어 있다. <안개> 촬영 시 신성일 씨와 러브신을 앞두고 어쩔 줄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는 나에게 “미쓰 윤, 배가 너무너무 아파서 참을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면 돼.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겁내지 말아요.”라고 했다. 데뷔한 지 1년도 안 된, 긴장해 떨고 있는 신인배우에게, 그렇게 편안하고 다정한 모습으로 연기지도를 하실 수 있을까? 상영 후 그 장면은 무척 에로틱하다는 좋은 평을 가져다주었다.

김 감독님과 같이 자리를 함께하다보면 어느덧 마치 영화촬영을 하듯이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보듯이, 대화가 전개되어간다. 그는 아직도 젊음이 넘치는 큰 목소리로 웃음과 함께 세대를 넘어, 그리고 모든 주제를 넘나들며, 자리를 이끌어나간다. 우리는 시간의 흐름을 잊어버리고, 흥미진진하게 마치 영화를 보듯 그 속에 빠진다. 그는 모든 예술 분야에 지식이 풍부하여 같이 있는 사람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신다.

어느 날 집안을 정리하다가 아름답게 장식된 상패가 눈에 들어왔다. 그 상패를 보는 순간, 가슴이 뿌듯해졌다. 그것은 우리나라 영화를 사랑하는 아름다운 모임인 ‘고전영화 카페’ 회원들이 주는 20세기 한국영화를 빛낸 명콤비에 ‘김수용 감독, 윤정희’가 선정되어 받은 ‘명콤비상’이었다. 또 오랫동안 감독님과 주고받은 편지들을 다시 읽어보았다. 김 감독님께서는 편지의 마지막 문장에 언제나 잊지 않고 하시는 말씀이 있다. “우리 곧, 정말 정신 번쩍 나는 영화 하나 만들어 봅시다!”
감독님! 감독님과 함께하는 21번째 작품이 곧 만들어지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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