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서 지속이라는 문제가 있다. 당연히 거기서 끝나야 하는데 갑자기 그 대목을 할 수 있는 데까지 밀고나가는 순간과 마주칠 때 그건 일종의 결단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나는 그런 순간과 만나면 항상 감동을 받는다. 영화는 감동을 주어야 한다. 그것이 영화를 보는 내 믿음이다. 주인공이 아무리 울고 매달려도 나는 거의 감정적 동요를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영화가 자기 혼자만의 힘으로 온전하게 버틸 때, 결코 주인공의 감정을 착취하지 않으면서, 보는 우리에게 다른 사회적 이유나 역사적 부채의식을 요구하지 않으면서, 오로지 영화의 힘만으로 리듬을 만들어낼 때, 그리고 그것을 우리가 느껴보도록 할 때, 나는 그것이 시간의 예술인 영화의 숭고함이라고 생각한다. 말 그대로 물 자체가 되어버린 그 시간. 그 시간을 본다는 것. 한국영화사 책에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 임권택의 44번째 영화 <둘째 어머니>를 볼 때 나는 그런 순간과 마주쳤다.
이 영화는 1971년에 만들어졌다. 종종 임권택의 ‘발견’이라고 부르는 <만다라>보다 10년 전의 영화이며, 그 자신이 “영화감독으로서 자각을 한 첫 번째 영화”라고 부른 <잡초>보다 2년 전의 영화다. 이 시기의 임권택은 닥치는 대로 영화를 만들고 있었다.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은 1969년에 7편, 1970년에 8편, 1971년에 7편이라는 거의 경이적인 작업 속도로 영화를 만들었다. (3년간에 22편을 찍은 것이다!) 만주 웨스턴, ‘다찌마와리’ 액션활극, ‘고무신부대’ 멜로드라마, ‘반공’ 첩보영화, ‘국적불명’ 무협영화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장르에 걸쳐 있다. 나는 이 시기의 임권택 영화들을 방어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그 영화들 속에 포함되어 있는 걸작들을 구출해야 한다. 그리고 (내 생각에) <둘째 어머니>는 그중 한 편이다.
김지미를 주연으로 최무룡, 김희라, 안인숙, 신성일, 김민정이 나오는 이 영화는 컬러로 찍었고, 서정민 기사가 촬영하였다. 처음에는 제목만 보고 ‘첩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이 당시 한국영화에는 ‘첩의 영화’와 ‘계모영화’라고 불릴 만한 ‘아내’와 ‘어머니’ 장르가 있었다) 사실상 제대로 된 제목은 ‘두 번째 어머니’가 맞다. 두 아이의 어머니인 남옥(김지미)은 역시 두 아이를 가진 홀아비 형렬(최무룡)과 재혼한다. 나는 이런 장르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다. 시작도 하기 전에 뻔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임권택 감독도 뻔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영화는 갑자기 시작하자마자 형렬을 죽인 다음 영화에서 빼내었다. 그런 다음에 어떻게 하려고? 사실상 형렬이 죽으면 그의 두 아이는 남옥과 아무 사이도 아니다. 그러나 남옥은 그 두 아이를 감싸면서 자신의 두 아이에게는 거의 무조건적인 희생을 강요한다. 남편의 두 아이를 유학 보내고 대학에 보내는 동안 자기의 두 아이 중 하나는 가출을 하여 깡패가 되고 다른 딸아이 윤숙(안인숙)은 어머니와 함께 일을 하며 가난한 나날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기차에서 윤숙은 건축을 전공한 부유한 집안의 미남 동호(신성일)를 만난다. 그리고 둘은 사랑에 빠진다. 그때 남편의 딸 형자도 동호에게 사랑을 느낀다.
여차저차한 우여곡절 끝에 어머니의 속임수로 동호는 형자에게 보내고 버림받은 윤숙은 음독자살을 기도한다. 나는 거의 조건반사적으로 시계를 보았다. 그건 이야기의 구조상으로 여기서 끝날 수밖에 없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이제 더 해야 할 이야기는 남아 있지 않다. 그런데 이제 고작 1시간을 넘기고 있었다. 나는 중얼거렸다. 도대체 이제부터 남은 이 긴 시간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매우 긴 시간 동안 진행되는 이야기. 그러나 임권택은 가차없이 다른 대목들을 건너뛰고 있었다. 분명히 멜로드라마인데도 그는 눈물을 쥐어짤 만한 대목을 무시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이 대목에서 거의 영화를 멈춰 세우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약을 먹고 쓰러진 윤숙. 그런 다음 병원에 실려 간다. 윤숙이 깨어나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한나절에 불과하다. 그건 몇날 며칠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 안에서 무슨 드라마가 진행되는 것도 아니다. 살 것인지, 죽을 것인지를 놓고 게임을 벌이지도 않는다. 오로지 동선과 어머니 남옥의 행동만을 바라보면서 그것으로 28분 동안 진행된다. 1시간 35분인 영화에서 거의 3분의 일을 여기에 바치고 있을 때 이건 임권택의 결단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거의 그 자신의 연출만으로 영화 전체를 감당하고자 할 때, 그것이 그 무언가를 노리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무슨 감동이나 눈물을 쥐어짜내려는 것과 무관하게, 영화가 어떻게 해야만 여기서 무너지지 않을 것인지 필사적으로 진행되고 있을 때, 나는 그것이 영화의 존재론과 마주 서는 순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거의 망연자실하게 그 시간 동안 진행되는 임권택의 영화적 리듬감을 감동을 안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영화에서 볼만한 것은 ‘영화적인 것’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해서 영화에서 무엇이 영화적인 것인지를 질문해야 한다. 종종 우리는 헛된 것에 시선을 빼앗길 것이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우리를 올바르게 인도하는 것은 예술가들의 고군분투뿐이다. 나에게 그것을 일깨워주는 이름(중의 한 사람)은 임권택이다. 그리고 누구도 명단에 넣지 않은 <둘째 어머니>와 같은 영화를 ‘발견’할 때 그 기쁨은 더할 나위 없이 큰 것이다. 나는 또 다른 기쁨을 위해서 더 많은 영화를 볼 것이다. 그러므로 영상자료원에서도 더 많은 영화를 볼 수 있는 기회를 내주었으면 고맙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