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연말 <여배우들>이란 영화가 연일 화제에 올랐다. 고현정, 최지우, 윤여정 등등의 여배우들이 한데 모여 합을 이루었다 하니 직접 확인하진 못했지만 자못 그네들의 속내가 궁금해진다. 극장가의 <여배우들> 못지않게 당대 내로라하는 여배우들이 모인 곳이 있으니, 다름아닌 한국영화박물관이다. 한국영화박물관에서는 다양한 여배우의 흔적을 만나볼 수 있다. 상설전시를 가장한 특별전시 ‘우리 시대의 여배우들’이 그 중심이다. 한국의 어머니부터 여전사까지, 일제강점기를 시작으로 한국 영화 속 여성들이 어떤 모습으로 표현됐는지, 그 모습은 현재에 비추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보여주는 전시다. 시대를 대표하는 여성상과 그녀들의 출연 영화, 그리고 대표배우의 피규어를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의 여성들은 오빠의 공부를 위해 혹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기생이 되었다. <낙화유수>의 복혜숙은 화가를 사랑하는 기생이었고, <어화>의 박노경은 오빠의 공부를 위해 기생이 된다, 그당시 조선 영화 최고의 여성스타는 단연 문예봉이다. <임자없는 나룻배>에서 뱃사공의 딸로 데뷔한 문예봉은 조선 최초의 발성영화 <춘향전>에서 최고의 스타로 등극한다. <미몽>에서는 남자를 위해 가족을 버리고 가출하는 파격적인 여성상을 연기하기도 하고, <조선해협>에서는 가족들에게 인정받지 못하지만 꿋꿋한 현모양처로 분해 조선적 여인상의 원형이 되었다.
1950년대를 대표하는 여성으로는 아프레걸과 자유부인을 들 수 있겠다. 전후 한국에 밀려온 서구 풍조가 아프레걸(전후파를 뜻하는 아프레게르(apres-guerre)에 걸을 합성해 만들어진 용어로, 전후의 자유로운 여성을 의미하는 말)이라는 여성상을 만들어냈다. 그녀들은 영화 속에서 서구적이며 성적으로 자유로운 여성으로 등장해 도덕적 비난을 받기도 하고, 영화 말미에는 죽음을 맞으며 사회적인 경종을 울렸다. 한편으로는 바람난 <자유부인>이 있다. 베스트셀러인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대학교수 부인이 춤바람 나는 이야기를 담고 있어 화제를 불러일으킨 작품이다. 당시 서울대 교수 황산덕은 “<자유부인> 한 편은 중공군 100만 명만큼이나 우리에게 해롭다”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자유부인> 속 주인공 김정림은 당시 혼란한 전후 사회를 대표하는 여성상으로 스타덤에 올랐으나, 이렇다 할 후속작을 내지 못하고 관객들에게 잊혔다.
1960년대 이후 한국 사회가 점차 안정을 찾으면서 어머니로서의 미덕을 갖춘 여성상이 부각되었다. 그런 한국의 어머니를 대변하는 배우가 최은희와 황정순이다. 최은희가 구현한 어머니는 홀로 딸을 키우며 절개를 지키는 과부로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에서 애잔한 마음을 자아냈다. 1947년 <새로운 맹서>로 영화계에 데뷔한 최은희는 1961년 신상옥 감독이 연출한 <춘향전>으로 영화왕국 ‘신필름’의 히로인이 되었고, 1965년에는 직접 <민며느리>를 감독하며 한국 영화 사상 세 번째 여성감독이 되었다. 황정순은 20대부터 중년부인 역을 맡기 시작해 나이 마흔에 <민며느리>에서 시어머니를 연기하면서 한국의 대표 어머니가 되었다. <박서방>과 <마부>에서 다정다감하면서도 엄한 서민적 어머니상을 보여주었고, 김승호 때로는 김희갑과 콤비로 <삼등과장> <팔도강산> 시리즈에서 자애로운 어머니로 자리매김하였다. 이후 <로맨스 가족> <화산댁> 등 다양한 어머니상을 연기한 그녀는 70년대부터 영화, 방송, 연극 등을 오가며 활동하였다. 한국영화에는 다양한 유형의 악녀들이 등장한다. <월하의 공동묘지>의 도금봉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등장인물 모두를 파멸로 몰아넣는 악독한 식모로 분해 한국 영화 사상 최고의 악녀를 보여줬다.
보통 악녀들은 영화 속에서 벌을 받으며 가부장적인 틀 안에서 여성의 욕망이 통제되는 양상을 보여주지만, 한편으로는 관객들은 이런 악녀들에게 계속 현혹되었다. <육체의 문>의 전옥, <천년호>의 김혜정, <하녀>의 이은심도 거침없이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며 한국 영화사 속에서 매혹적인 악녀를 선보였다.
1970년대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농촌의 아들 딸들이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올라왔다. 아들은 공장으로, 딸들은 술집으로, 몸 하나를 밑천 삼아 도시 생활을 시작한 이들은 변두리에서 고단한 삶을 이어갔다. 농촌 가정의 맏딸로 태어나 서울에 올라와서 가정부, 봉제공장 노동자, 버스차장을 거쳐 성매매 여성까지 <영자의 전성시대> 속 영자의 인생 역정은 도시화, 산업화 시대의 그늘을 고스란히 보여줬다. 1970년 드라마로 데뷔한 염복순은 <영자의 전성시대>에서 영자 역을 맡아 일약 스타가 되었으나, 이후 출연한 아류작들의 흥행 실패로 드라마로 돌아가게 된다. 1970년대 또 다른 여성 스타들이 있었으니, 하이틴 영화 속 많은 아역 스타가 그 주인공이다. 기존 영화에서의 아역은 어른들을 위한 영화에 어린아이 역으로 등장할 뿐이었으나, 70~80년대의 아역들은 동세대에 어필하는 스타였다. <진짜진짜 좋아해>의 갈래머리 임예진은 대중문화의 아이콘으로 자리잡았고, 80년대에 들어서서는 이미연, 김혜수, 하희라가 계보를 이어 청춘 스타로 활동하였다.
1970~80년대 검열과 텔레비전의 등장은 영화산업의 침체를 야기하고, 조금 더 자극적인 화면으로 관객을 이끌기 위한 영화인들의 몸부림은 <애마부인> 같은 시리즈를 양산하게 된다. 남편이 감옥에 간 사이 성욕을 주체하지 못해 다른 남자와 바람이 나는 애마부인 시리즈의 안소영은 당대 최고의 육체파 여배우이자 바람난 여자의 대표주자였다. 또한 이때 토속 에로물이나 해외 영화제 수상을 노리고 한국의 풍습을 다룬 영화에서 불행한 봉건 여성들의 캐릭터가 많이 등장했다. <씨받이>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 등에서 등장하는 봉건적 가부장제 사회의 여성들은 정절과 아들 출산을 강요하는 관습 속에서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 아역으로 데뷔한 강수연은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 <감자> 등에서 성숙한 연기를 보여주었고, <씨받이>로 베니스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1990년대를 넘어서면서 청순가련형의 시대는 가고 강한 여자들의 시대가 도래했다. 최근에 부각되고 있는 캐릭터는 여전사들이다. <조폭마누라> 속 신은경은 절대 남성지대의 암흑가에서 조폭계의 전설이 되고, <괴물> 속 배두나는 괴물에게 잡혀간 조카를 구하기 위해 활을 든다. 또한 여성의 교육 기회가 확대되고 사회 진출이 활발해지면서 전문직 여성들이 스크린에 등장한다. <결혼이야기>의 심혜진은 방송국의 성우로, <마누라 죽이기>의 최진실은 영화 프로듀서로 남편 못지않게 일에 열정적이고 독립적인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공동경비구역 JSA>의 이영애는 공동경비구역 안의 살인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중립국의 수사관으로서, 냉정하고 침착한 자세로 사건을 해결하는 여성으로 분했다.
마지막으로 <밀양>으로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거머쥔 전도연을 필두로 우리 시대의 스타 여배우들이 영화계에 주축이 되어가고 있다. 심은하, 전지현, 문소리, 김혜수 등등 앞으로는 더 다양하고 멋있는 여성들의 모습을 스크린에서 또 한국영화박물관에서 만나볼 수 있게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