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4학년이던 해 여름이었다. 가좌역 뒤편 모래내의 국민주택 단지에 살던 친구의 집에 놀러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배웅을 나온 친구와 친구의 두 살 어린 동생, 그리고 나는 신작로 건너 은좌극장의 간판을 발견하자, 얼굴이 굳어지고 말을 멈췄다. 거짓말 같지만 100여 미터 떨어진 은좌극장의 간판이 갑자기 우리 눈앞으로 줌인되었던 것이다. <첫 경험>(황혜미, 1970>. 극장 간판에는 벌거벗은 여자의 뒷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사실 벌거벗은 여자의 뒷모습이라고는 하지만 상의를 살짝 내려서 목선과 어깨가 드러나는 정도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런 요염한 자태의 여자 모습을, 그것도 공공장소에 저렇게 커다랗게 그려져 있다는 것이 충격적이었다. 게다가 첫 경험이라니. 첫 경험이란 제목이 주는 수많은 생각에 친구와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면서 동시에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서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대충 짐작하는 어색한 침묵이 생겼다. 모두 말이 없어진 그 순간, 친구의 동생은 넋이 나간 듯 극장 간판에 그려진 벌거벗은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더니, “저 영화 보고싶다”고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자식 대단하다 저런 영화를 보겠다는 결심을 하다니’ 하며 집으로 돌아왔고 며칠 후,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초등학교 2학년밖에 안 된 친구의 동생은 <첫 경험>이란 영화를 보기 위해 무서운 어른들이 득시글거리는 은좌극장에 혼자서 들어가 기어이 영화를 본 것이다. 우리는 그의 용기에 감탄하고, 부러움을 감추느라 “자식 엉큼하긴” 하고 놀린 후, 슬며시 영화가 어땠느냐고 물었고, 질문의 뜻을 재빨리 알아차린 친구의 동생은 그런 종류의 일을 맨 처음 경험한 선각자들이 으레 하는 말을 그 어린 나이에 내뱉었다. “뭐 시시해서 잠자다 나왔어.” 당시 왕우와 이소룡이 나오는 홍콩 무술 영화에 빠져 있던 나는 무시무시한 어른들 틈에서 당돌하게 영화들을 보았더랬다. 내가 무술영화를 보러 항상 가던 은좌극장, 대흥극장 같은 동시 상영관에서는 본 영화가 상영되기 전에 두 번 세 번 관객들이 그 영화를 꼭 보러 오겠다는 결심을 할 때까지 주구장창 예고편을 틀어주었다. 그런 예고편들 중에는 어린 내가 보기에 좀 민망한 장면들이 있었다. 그런 영화들은 이모와 고모를 따라가서 그녀들이 가져간 하얀 손수건이 젖을 때까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보던 <미워도 다시 한 번> 시리즈 같은 영화들의 사랑과 이별, 그리고 눈물을 쏙 뽑아내는 어린 아역배우의 연기, 이런 것이 아니라 성에 관해 이야기하는 그런 영화들이었다. 내 막연한 상상에 <첫 경험>이란 영화는 어른들의 성에 관한 영화라고 생각하고 그런 것은 어린아이가 보기에는 민망하고, 그런 영화를 본다는 것은 엉큼한 것이고, 그것은 남자답지 못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하는 영화들이었다. 그로부터 1년 후, 나는 서울역 뒤의 그 무서운 봉래극장에 들어가 스캔들에 연루되어 사라진 아름다운 여배우 양정화가 주연으로 나온 <밤에도 뜨는 태양>과 <성숙>을 몰래 보러 가서 홍콩 무술 영화에서는 절대로 느낄 수 없는 대단한 경험을 했는데, 영화를 보면서 나오는 탄성과 환호는 주인공이 멋지게 악당을 물리쳐야만 가능한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검열에서 용케 살아남은 야한 장면이 나오면 극장 안은 조용해지고 여기저기서 어른들이 침을 꿀꺽 꿀꺽 삼키는 소리와 탄성, 환호가 터지는 것이었다. 홍콩 무술 영화의 세계와는 다른 묘한 세계를 경험했지만, 극장 밖을 나오며 동생의 친구처럼 나 역시 “뭐 시시하잖아. 잠만 자다 나왔네” 하며 잘난 척을 했더랬다.
그리고 시간을 건너뛰어 내 나이가 서른 중반이었을 무렵 나는 영화의 조감독이었다. 고인이 되신 유영길 촬영감독께서는 저녁 식사 후, 또는 촬영과 촬영 사이 뜻하지 않게 찾아온 긴 휴식시간 동안 가을 저녁의 선선한 바람을 느끼며 촬영장 앞마당에 놓인 평상 위에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으셨는데, 주로 1960년대 말, 70년대 초에 자신이 직접 겪었던 현장 이야기들이었다. 워낙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셔서 빠져들기가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당시 한국 최고의 높이로 건설되던 청계로의 삼일빌딩 건설 현장의 까마득한 높이의 철근 골조 위에서 가느다란 철사 줄 하나를 허리에 묶고 다큐멘터리를 찍었던 이야기며, 한국 최초의 입체영화 <임꺽정>을 찍기 위해 카메라의 렌즈를 줄칼로 깎아서 입체 영화를 찍을 수 있는 특수렌즈를 만들었던 이야기며,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해주셨다. 그러던 어느 날, 촬영 현장에서 스크립터로 일하던 이미연 감독의 성실함과 재능을 칭찬하며 한국 영화 현장에 뛰어난 여성 스태프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하던 도중, 60년대 말 70년대 초 아름답고, 재능 있던 어느 전설적인 여성 영화감독에 대한 이야기를 추억에 잠긴 눈으로 하셨다. 그 여성 영화감독의 이름은 황혜미였고, 그녀가 만든 첫 영화의 제목이 <첫 경험>이었다. 고 유영길 촬영 감독께서 황혜미 감독을 처음 만난 것은 <안개>(김수용. 1967> 때 촬영 스태프로 영화 작업에 참가하면서였다. 영화 <안개>의 촬영 현장에는 원작자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소설가 김승옥 씨가 있었고, 기획자 황혜미 씨가 있었다. 고 유영길 촬영감독께서는 첫눈에 황혜미 씨가 당시 충무로 영화 현장의 남녀를 막론하고 가장 인문학적 소양이 깊고 자의식이 강한 여성임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소설가 김승옥의 감독 데뷔작 <감자> 때의 이야기다. 뛰어난 소설가이며 시나리오 작가인 감독이 데뷔작이라는 중압감 때문이었는지, 아무리 해도 시나리오가 나오질 않는 것이었다. 그때 영화 <감자>의 기획자이던 황혜미는 김승옥 감독을 독려하여 시나리오를 탈고하면서 그녀의 뛰어난 재능을 인정받았다고 한다. 고 유영길 촬영감독은 그때 그녀의 재능을 간파했고 그 인연 때문에 황혜미 감독의 두 번째 작품 <관계>에서는 자신이 촬영을 하게 되었다. 그 후 황혜미 씨는 영화 한 편을 기획했는데, 또 시나리오 작가에게서 시나리오가 안 나오는 것이었다. 시간은 흐르고 시나리오 작가는 두 손을 들고 포기를 선언하자, 이미 케스팅이 완료되고, 개봉일까지 결정되어 시간이 촉박했던 기획자 황혜미 씨는 충무로 골목의 여관으로 원고지 뭉치를 싸들고 들어간다. 서울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소설을 써볼까 하다가 김승옥이란 소설가의 글을 보고 소설가의 꿈을 접은 그녀가 이제 시나리오 작가를 대신해 원고지 뭉치를 들고 여관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리고 3일 만에 시나리오 한 편을 들고 나온다. 자 이제 감독을 찾을 차례였는데, 모두들 당신이 하는 게 더 잘할 것 같다는 말에 떠밀려 첫 영화 <첫 경험>을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그녀의 첫 영화는 산업화가 진행되던 당시 한국 여성들의 성 모럴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것은 7년 후 <겨울 여자>로 한국 여성의 성 모럴에 관한 이야기가 본격화하기 이전의 문제작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문제작은 성 모럴에 대한 진지한 질문과 성찰보다는 최고의 학력을 가진 여성 영화감독의 데뷔작이라는, 흥행을 위한 과대선전에 파묻히고 필연적으로 그런 흥미 위주는 감독의 주제의식을 발전시키기보다는 흥행을 위한 자극적 성애만을 강조하는 쪽으로 이 재능 있고, 자의식 강한 여성감독을 괴롭혔던 것 같다. 두 번째 영화 <관계>, 세 번째 영화 <슬픈 꽃잎이 질 때>를 만들고는 대한민국, 서울, 충무로 영화계라는 빈곤하고, 투박하고 거친 남성 사회에서 자신의 재능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황혜미 감독은 사라져버렸다. 물론 그녀의 작품은 한 작품도 남아 있는 것이 없어 나를 포함한 아무도 그녀가 어떤 문제의식을 가지고 무슨 영화를 만들었는지 알지 못한다. 그냥 허망한 전설로만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