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님, 처음 스승인 감독님을 처음 뵌 것은 제가 고등학교 1학년 때였습니다. 그때 저는 교지 편집을 하고 있었고 학교 선배이신 감독님을 유프러덕션으로 찾아 뵈었습니다. 그때는 1976년 봄이었고 제 나이 열다섯이었습니다. 명동입구 라이온스 호텔 건너편 구 황실다방 2층에 위치한 유프러덕션에는 감독님의 집무실이 있었습니다. 저는 간단히 준비한 10개 미만의 설문을 보여드렸고 감독님께선 잠깐 기다리라 말씀하신 후 안쪽 방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문이 열려 있어 힐끔 쳐다볼 수 있었습니다. 감독님께선 원고지에 꼼꼼히 쓴 글을 제게 주셨습니다. 빽빽하고 길게 쓰신 그 원고는 현재 휘문고등학교 교지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학교 다닐 때 인상적이었던 기억은?” 활주로를 닦기 위해 동원되어 종일 일본군 비행장 청소만 했던 기억이 난다는 회고담이 실려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감독님의 아픈 상처는 항상 뇌리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본인이 겪은 식민지 시절의 기억과 가난과 실향의 고통입니다. 그것이 한국인 혹은 현대인의 보편적인 정서로 확대된 것이지요.
어느 날 감독님은 동국대학교 1학년인 우리를 아침 6시에 단성사 앞으로 집합시켰습니다. 1980년 광주항쟁이 있기 전인 3월 아니면 4월이었고 내 나이 열아홉이었습니다. 대학생들은 운동권이 아니어도 모두 다 들고 일어나 군부독재 타도를 외치며 반정부 데모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감독님이 사주신 선지해장국을 맛있게 먹고 7시 반에 감독님이 연출한 <사람의 아들>을 단체관람했습니다. 강태기 씨가 하명중 씨를 칼로 찌를 때부터 코끝이 찡하더니 천둥 번개가 치면서 미소를 지으며 죽던 하명중 씨의 모습에 나는 그만 엉엉 울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소리 내어 울면 창피할까봐 숨죽여 흐느껴 우느라 몹시 힘들었습니다. 이때부터 나는 감독님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제자들을 위한 애정과 영화에 열정을 바치라는 삶의 좌우명은 이때 생긴 것입니다. 고통에 처한 사람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살리라 다짐했습니다. 영화로 비참한 인간을 구원하리라 다짐했습니다.
항상 수업이 끝나면 유프러덕션에 가서 감독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얼쩡거렸고 그때 그 사무실엔 이미례 감독, 이공희 감독이 있었고(당시 연출부) 위층에는 홍파 감독님, 지상학 작가님, 김청기 감독님 등이 <로보트 태권브이>를 제작하는 일로 계셨습니다. 일층 레스토랑 ‘칠요일’에 가면 충무로의 온갖 영화인들이 진을 치고 술 마시고 있었습니다. 김호선 감독님, 박평식 평론가님, 석도원 감독님, 김갑의 기획자님, 이영실 감독님, 이영일 선생님, 이두용 감독님, 이장호 감독님, 유동훈 작가님,
백결 작가님, 서영수 감독님, 정인엽 감독님, 이석기 촬영기사님, 장길수 감독님 등이 있었습니다.
가난했지만 서로를 보듬으며 열심히 살던 모습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항상 충무로에서 술을 마셨고 거기엔 늘 감독님이 계셨습니다. 감독님, 위대한 스승의 발자취가 한없이 그리워지며 회한에 젖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