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와 60년대 한국영화계의 주된 화두는 작가정신, 영화정신이었다. 영화의 흥행 여부가 영화의 존재 여부를 결정하던 시대에 사회를 담고, 인간을 담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 불굴의 정신력이 아니면 불가능하던 시대가 낳은 담론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감독 유현목이 서 있었다. 한국리얼리즘의 상징으로 대변되는 유현목의 작가적 위치는 무엇이 한국리얼리즘인가 하는 이론적인 논쟁을 넘어서 피폐한 영화 현실과 맞서 자기의 영화세계를 구축했던 그의 고집스러움에 존재한다.
유현목 감독은 1925년 황해도 사리원에서 태어났다. 극단 공연에 심취하고 소설에 빠져있던 유년기를 지나 동국대 국문과에 입학한 그는 어느 날 프랑스 영화 <죄와 벌>을 보고 영화에 몰입하게 된다. 그는 영화를 배우기 위해 배우시험을 치고, 그를 눈여겨본 조정호 감독의 제안으로 영화계에 조연출로 입문한다. 1955년 전대미문의 성공을 거둔 이규환 감독의 <춘향전>의 조연출이었다는 것에 힘입어 1956년 <교차로>로 감독으로 데뷔한 그는 곧 한국영화계의 리얼리즘 계보를 이어갈 감독으로 주목받게 된다.
1961년 발표된 <오발탄>은 이런 평가가 과장된 것이 아님을 증명하였다. 전쟁의 상흔 속에 휘청거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방향 잃은 삶을 조명한 이 작품은 혼란스러운 한국현대사를 고스란히 담아낸다.
<오발탄>은 유현목의 작품세계를 그대로 반영한다. 상한 치아들을 한꺼번에 뽑아버리고 싶은 절박함과 휘청거리는 발걸음을 제어할 수 없는 피로감과 어디론가 가고 싶지만 갈 곳을 알 수 없는 절망감은 유현목이 바라보던, 혹은 벗어나고 싶어 하던 세상이었고, 그는 영화 속 주인공처럼 늘 번민과 고뇌 속에서 방황하고, 고민하며 작품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한국영화사에서 가장 일관된 작품세계를 지닌 감독으로 자리 잡았다.
유현목은 한국영화사에서 가장 지적인 감독으로 평가받는다. 이것은 그가 고등교육을 받고 관념적인 영화를 만들었기 때문이 아니다. 이는 그가 행동하는 지식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의 모순적인 영화 제작 환경을 비판하고, 검열제도 철폐에 목소리를 높였다. 이만희 감독이 <7인의 여포로>로 인하여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었을 때 공개적인 구명운동과 정부 비판에 나선 것은 유명한 예다. 이로 인해 유현목 감독 자신도 반공법위반으로 소환되었고, 연이어 <춘몽>의 음화제조법 위반으로 기소되는 파란을 겪기도 하였다.
유현목은 천재감독이 아니었다. 그는 생각하는 감독이었다. 그는 한국영화라는 토양 위에 고민과 성찰로 영화의 싹을 틔우고, 거목이 되어 우뚝 섰다. 그가 견뎌내야 했던 억압과 번민의 시간이 그 나무에 정신을 불어넣었다. 지난 6월 28일 유현목 감독은 세상을 떠났지만 이제 그가 일군 나무의 넓은 그늘 아래서 그의 후배들이 영화를 통한 자유를 꿈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