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28일 유현목 감독이 세상을 떠났다. 1960년대 한국영화 르네상스의 전설들이 하나 둘씩 사라져가고 있다. 이만희 김기영 신상옥 그리고 유현목 감독까지… 그는 전설이지만 거의 마지막까지 현역이었다. 그는 1990년대까지 영화를 찍었고, 2007년 봄 뇌경색으로 쓰러져서 휠체어 생활을 시작하기 바로 전까지 대학 강단에 섰다. 유현목 감독의 빈소에는 신구세대를 아울러 충무로 사람들이 모처럼 총출동했다. 거기에는 전설만이 아닌, 동료를 떠나보낸 서운함 같은 것이 있었다. 좀 엉뚱한 이야기지만, 유현목 감독이 세상을 떠난 6월28일은 부인 박근자 화백의 생신이었고, 영결식이 열린 7월2일은 그 자신의 생신이었다고 한다. 50년을 함께해온 부부의 금실은 유명했는데, 유현목 감독은 이별의 절차도 자신의 영화처럼 그렇게 꼼꼼하게 콘티를 짰던 것일까.
1960년대를 르네상스라 부르는 것은 비단 영화 편수와 영화 인구뿐 아니라 그 양산 체제 속에 뛰어난 감독들이 배출되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진지하고 심각한 1960년대적 정치의식을 대표하는 작가가 유현목 감독이다. 또한 그 진지하고 심각한 정치의식의 절정에 있는 작품이 <오발탄>이다. 전후사회를 그처럼 비관적인 어조로 이야기하는 영화가 1960년에 나왔다는 것이 기적이다. 판잣집이 나와도 멀리 경무대가 보여도 검열에 걸렸던 자유당 말기에 이런 영화를 기획했다는 것, 제작비가 없어 배우들이 무보수 출연하고 스태프들이 호주머니 털고 해서 몇 차례 촬영중단을 겪으면서 2년 걸려 완성했다는 것, 그야말로 독립운동하듯 영화를 찍었던 유현목 감독의 집념이 존경스럽다.
영화 찍던 중에 자유당정권이 무너지면서 대본을 새로 썼고 또 개봉까지 밀고 갈 수 있었으니, <오발탄>은 4.19가 한국영화사에 준 선물인 셈이다. <오발탄>은 1963년 샌프란시스코영화제에 초청되었는데 그것은 이 영화의 운명에 크나큰 행운이었다. 이 영화제가 아니었으면 <오발탄>은 영화사에 이름으로만 남았을 것이다.
지금 전해지는 <오발탄>은 영화제에 출품됐던 프린트를 1980년대에 영상자료원이 샌프란시스코에서 들여온 것이다. 물론 영어자막 프린트다. <오발탄>은 이따금 언론매체들이 발표하는 ‘한국영화 베스트 10’에서 부동의 1위인데, 한국영화사의 주요 걸작을 영어 자막이 들어간 화면으로 본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영상자료원은 2007년에 디지털 복원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지만 자막 제거가 워낙 힘든 작업이라 <오발탄> 복원은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지만 2008년 우리가 민간업체 및 대학 연구소와 함께 자막 제거 소프트웨어를 개발해 비용을 절감할 수 있게 되었으니 <오발탄>복원도 한결 수월해지게 되었다. <오발탄>의 복원 작업이 이루어지면, 한국영화사 100년의 최고 걸작이라는 영화를 영어 자막 필름으로 볼 때의 이물감은 졸업할 수 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