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예술의 魂혼과 脈맥 유현목을 추억하다 ②

by.김호선(영화감독) 2009-09-18조회 1,213
유현목

To. 유현목

감독님, 지금 계시는 그곳은 어떤지요. 지낼만한 곳인가요? 가보지 않아 알 수 없지만 소문으로는 인간세상보다 훨씬 더 났다면서요? 저희가 지금 살고 있는 세상은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까지 한데 뒤엉켜 구별이 안 되지만 그곳에선 선과 악, 천국과 지옥이 구별되어 있으니 인사 시스템도 필요 없을 것 같고요. 편견과 갈등, 좌우대립, 폭력국회, 신구세대 간 갈등, 촛불집회, 폭력적 노사갈등, 대기업의 영화계 독과점과 불공정거래도 자동해소될 것 같은데 어떠세요? 영화도 투자자의 압력 없이 자기 생각대로 만들 수 있나요? 그토록 좋아하시던 담배와 맥주도 있는지요. ‘문희’처럼 아름다 운 여배우도 있나요. 아직 못 가봐서 확인할 길은 없지만, 아마도 그곳엔 하느님 한 분만 계시고, 하느님을 뽑는 선거도 없을 테니까 갈등 없이 지낼만한 곳이라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내게 주어진 일에 충실하기에도 바쁜데 정치하는 사람들이 강요하는 이념적 갈등으로 불필요하게 좌우로 몰려다니며 시간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제가 감독님을 처음 뵌 건 1967년 초겨울 선배님의 소개로 명동에서였습니다. 당시 영화를 공부하기 위해 프랑스문화원과 영화계를 오가던 저에게 감독님의 문하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온 건 큰 행운이었습니다. 몇몇 감독님 밑에서 일해봤지만 제가 가장 선호한 분은 유일하게 감독님이었죠. 무한한 존경심과 흠모의 마음을 가지고 있던 저는 예기치 않은 감독님의 행동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감독님께서 승차 거부하는 택시를 발로 차는 바람에 명동파출소로 연행됐지요. 우리 모두 함께 갔지만요. 감독님께 함부로 말하는 경찰관과 제가 말다툼을 벌이자 감독님께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큰소리로 “독재자 하수인들아 이거나 먹어라!” 하며 파출소 안에 소변을 갈겼어요. 그때 감독님 나이 40대 초반이었어요. 당시로선 상상도 못할 일인데 서슬 퍼런 경찰들이 가만있었을 리 없었겠죠. 어찌어찌 해서 수습은 했지만, 전 그때 감독님의 광기와 분노를 처음 봤습니다. 저 역시 4.19 때 데모하면서 짠 밥을 먹어본 신세라 당시 경찰들과 싸우는데 이골이 날 지경이었지만, 권위주의적일 거라 생각했던 대 유현목 감독에게 그런 정신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한 터라, 감독님이 더더욱 존경스러웠습니다. 동지(?)를 만난 기분이었으니까요

이후 감독님과 생사고락을 같이하면서 장발로 인해 함께 경찰서에 잡혀간 적도 있었죠. 제가 나서서 감독님 머리카락을 보존한 채 탈출시켜드리고 머리 깎으면 훈방조치, 아니면 구류였는데 전 후자 쪽을 선택했죠. 이유인즉은 ‘내 머리에 대한 권리는 내게 있다’ 였습니다. 일제강점기에 단발령 내렸을 때 조상의 유산 중 머리카락도 정신적인 큰 유산으로 여기고 머리 깎기를 거부하고 자살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만 목숨까지 걸 일은 아니고…. 어쨌든 5일간 구류 마치고 사무실에 나타나자 감독님은 멋쩍게 웃으시며 “허허 이 친구 머리 안 깍였네.” 그 한마디가 전부였죠. 세상에 경찰서에 잡혀 있는 저를 보고 혼자만 살겠다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듯 간 양반이 면회나 사식은커녕 위로의 말 한마디 없다니…. 내심 서운한 생각이 들었지만 저녁 술자리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죠.

“훌륭한 감독이 되려면 세상일을 두려워 말고 뛰어들어라! 좋은 자리부터 골라 앉지 말고 나쁜 자리부터 찾아 앉아라!”

감독님은 늘 작품을 시작하기 전부터 강박관념으로 불안과 초조에 휩싸이곤 하셨죠. 마치 열병을 앓는 사람의 모습처럼 느껴졌습니다. 지방촬영을 갔을 때 일인데, 여관방이 모자라 감독님과 한방을 쓰게 됐는데 한밤중에 “악마야 죽어라!” 하며 제 목을 조른 생각나시죠. 이후부터 저는 어떤 상황에서도 감독님과 동침은 거부하게 됐죠.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두터운 안경 너머 빛나는 감독님의 눈빛이었습니다.

그 눈빛은 과녁을 찾는 빛나는 칼날 같았고, 빈틈 하나 없는 그물처럼 명료했습니다. 자폐아 같은 표정으로 오직 자신이 만들 영화에만 집중하는 모습은 때로 냉혹하고 참 무서웠고 부담스러운 눈빛이었습니다. 눈빛만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고 어떤 살가운 감정도 배어 있지 않은 호통에 가까운 큰 목소리도 사람을 질리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감독님의 별명을 지어드렸죠. 사람들 모두가 ‘유 핏대!’ 라고 부르는 거 알고 계시죠. 더 기가 막힌 일은 감독님께서 미국 정부의 초청으로 사모님과 다녀오신 직후였습니다. 작품 의뢰를 초조하게 기다리던 차에 작품 <환녀> 의 연출 의뢰가 들어와 시나리오를 읽어보고는 감독님의 수준에 맞지 않는 작품이라며 제가 극구 반대했었죠. 전 그때 <영자의 전성시대>로 감독 데뷰를 준비할 땐데 감독님 고집대로 촬영을 시작한 지 10여 일 만에 결국 시나리오의 미비로 작품을 포기하시고 제게 떠넘기셨죠. 전 도망쳤지만 결국은 굴복하고 말았는데.

아직 감독으로서 처녀딱지가 붙어있는 제가 땜빵감독으로 전락해서야 될 일인가요? 그때 제게 진 빚을 감독님은 갚지 않고 경찰서에서처럼 아니, 이번엔 아주 영영 도망쳐버리셨습니다.

인간 실존의 문제를 파고드는 무겁고 어두운 주제의식 때문에 늘 고민하시던 모습, 어떤 악조건에서도 물러서는 법이 없던 유현목 감독, 배짱과 고집과 철학과 집념으로 영화를 만드시던 그 모습은 이제 볼 수 없지만, 한국영화사에 영화가 예술이라는 자리매김을 해놓고 떠났습니다.

저는 감독님에게 오기를 뛰어넘는 집념을 배웠고, 감상을 극복하는 인간애도 배웠습니다. 영화에 대한 모든 것을 배웠고, 고집까지 물려받았으며, 섣부른 흥행감독의 허명에 묻히지 말기를 권고하시며 “나무만 보지 말고 산을 봐라! 그런 안목을 가져야 훌륭한 작품을 만들 수 있다!” 그렇게 충고하시며 감독님은 저의 스승이 되어주셨습니다. 흔히들 말합니다. 큰 나무 밑에는 풀도 자라지 않는다고. 그러나 저는 아직도 잘 자라고 있습니다. 언제 성장이 멈출지는 알 수 없지만 그날까지 메가폰을 놓지 않겠습니다.

후회 없이 풍운아로 사신 그 기세. 당신께선 반평생을 영화감독으로서, 나머지 인생을 후학들을 위해 다 바쳤습니다. 그 두 가지 모두 성공할 수 있었던 건, 자신의 의지로 자존심과 명예를 지킬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감독님에게 존경과 사랑을 보냅니다. 이제 좀 편히 쉬세요!

From. 김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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