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후반부를 강타한 ‘제3’의 멜로 정소영 감독의 <내가 버린 여자> (1977)

by.김한상(한국영상자료원 연구원) 2009-09-16조회 1,946
내가 버린 여자

1968년 <미워도 다시 한번>을 필두로 1960년대 말, 70년대 초의 극장가를 장악했던 이른바 ‘신파’ 멜로영화의 위력은 막강했다. 4년간 4편까지 이어지며 흥행을 이어갔던 <미워도 다시 한번> 시리즈는 숱한 아류작을 낳았고, 극장가는 비련의 여인에 공감하며 저고리 옷고름에 눈물을 훔치는 아낙들로 넘쳐났다. 그에 비해 1974년 <별들의 고향>에서 시작된 ‘호스티스’ 멜로영화 장르는 확실히 좀 더 젊은 관객, 그리고 좀 더 많은 남성 관객을 극장으로 끌어들였다. 전자가 상업영화 내부에서 복고적인 감성과 내러티브를 끌어들여 도달한 성취물이라면, 후자는 새롭게 상업영화로 진입한 청년 감독들의 젊은 감수성이 대중적 코드를 흡수하면서 만들어낸 발명품이었다. 여기까지가 1960년대 말에서 70년대로 이어지는 멜로영화 장르를 설명하는 데 있어 일반적으로 취해지는 구분이고, 또 그 시기 멜로영화를 설명해내는 ‘전부’다.

그 전부 속에서 흔히 호스티스 멜로로 분류되는 영화 <내가 버린 여자>는 인적(人的)으로 보았을 때 그 두 장르의 접점에 있는 작품이다. <미워도 다시 한번>으로 일약 흥행사로 떠오른 정소영 감독뿐 아니라 각본을 쓴 김수현 작가도 같은 시리즈에서 두 편의 시나리오를 담당한 바 있다. 쉽게 말해 1960년대 말 70년대 초의 ‘신파’ 멜로의 중심에 서 있던 이들이 10년 가까이 흐른 1977년에 이르러 당시 유행한 ‘호스티스’ 멜로의 문법으로 새 작품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 속의 몇몇 장면에서는 당대 청년문화를 연모하면서 만들었을법한 설정들이 심심찮게 보인다. 그러나 그러한 인적 관련성이나 관습적 표현에도 이 영화는 두 장르에 편입해서 설명할 수 없는 ‘다른’ 지점들을 보여준다. 이것은 어쩌면 1970년대 후반의 멜로를 설명하는 데 부족했던 공백의 지점을 메워주는 역할을 할지도 모르겠다.

판타지를 깨고나와 외치는 여자, 외면하는 남자

앞의 두 장르와 이 영화가 가장 크게 다른 지점은 멜로영화의 중심 소재인 ‘사랑’에 대한 입장에 있다. 신파 영화나 호스티스 영화가 공유하는 정서는 ‘그래도 사랑 그 자체는 순수하다’는 데 있다. <미워도 다시 한번>은 유부남의 무책임한 행동이 빚어낸 비극을 그리고 있지만 남자주인공이 보인 사랑의 감정만큼은 진실한 것이었다는 내용을 전체 시리즈에 걸쳐서 담아내고 있으며, <별들의 고향>이나 <영자의 전성시대>의 경우에는 호스티스 여성을 학대하고 외면하는 사회에서도 그녀를 진심으로 대하는 남성이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가장 극단적인 사례는 <내가 버린 여자>와 같은 해에 나온 <겨울 여자>일 텐데, 여기서 여주인공은 모두의 사랑에 감사하고 그들에게 사랑을 돌려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반면 이 작품의 기조는 그러한 사랑이 한 꺼풀 두 꺼풀 벗겨내 들어가보면 결국 계급과 성적인 차이를 가려주는 판타지일 뿐이며, 그것을 모두 벗겨내고 남는 것은 비정한 현실이라는 데 있다. 부모 없이 고모 슬하에서 어렵게 자란 정애(이영옥)가 좋은 가문과 안정된 직장을 배경으로 늦게까지 결혼을 미루고 있던 수형(윤일봉)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는 이야기, 그리고 그들의 결혼이 연적의 방해와 주변의 반대로 위기를 맞아 비극으로 끝나게 된다는 이야기의 전반적인 구조는 평범해 보이긴 한다. 그러나 파국을 불러오는 여러 계기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이유는 결국 두 사람의 계급적 격차, 성적인 차이다. 유산한 아이가 자신의 아이인지 말하라며 다그치는 수형에게 정애는 말한다. “네, 결국은 당신도 그 두터운 위선의 껍질을 벗었군요. 그걸 벗으니 당신도 별수 없어. 그렇게 가문이 좋고 혈통이 좋고 교양 있는 신사도 별수 없군요. 좋아요. 어차피 우린 맞지 않아요. 하늘과 땅 차이죠. 네, 난 거짓말을 밥 먹듯 해치우던 거리의 계집이에요.” 작가 특유의 대사 처리가 돋보이는 이 장면은 이 영화가 그때까지 끌어오던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한순간 폭발시키며 급격하게 비극적 결말을 예상케 하는 클라이맥스인 동시에, 그간 한국 멜로영화가 꼭꼭 숨겨왔던 비밀, ‘사랑’에 대한 그 순애보적인 판타지를 일거에 무너뜨리는 명장면이다. 분노하며 집을 나가라고 외치는 수형에게 정애가 다시 응수한다. “나가죠. 나가고말고요. 더 붙잡는대도 난 갑니다. 발자국 소리도 크게 낼 수도 없어요, 이 집에선. 마음 놓고 웃지도 못해요. 춤을 춰선 안 된다, 반바지를 입어서도 안 된다, 이 집에선 안 되는 것 천지죠. 언제나 고상한 말씨, 고상한 옷차림, 고상한 걸음걸이. 아…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충실한 로케이션으로 비정한 격차를 표현하다

집을 나간 정애는 유산의 후유증으로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다시 집앞에 선다. 자신의 사랑이 진실했음을 호소하며 문을 열어달라는 정애, 그러나 수형은 정애와의 관계를 포기하고 술에 취해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 아니, 그것은 정문과 집의 거리가 먼 저택이라서 가능한 일, 그래서 더더욱 그녀와 수형의 격차를 상기시키는 공간적 거리 때문이다. 이처럼 이 작품의 큰 미덕은 장소의 선택으로 판타지 이면의 현실을 잘 드러내고 있다는 데 있다. 가파르게 솟아있는 계단을 올라야만 도착할 수 있는 달동네 꼭대기의 낡은 집들과 명동 거리 뒤편의 허름한 막걸리 집, 말끔한 독신자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아파트와 부유층의 전유물이었던 교외 저택 등등 이 영화가 촬영된 실제 공간들은 그저 배경이 아니라 작품을 설명하는 중요한 키워드가 된다. 정애의 집을 찾은 수형이 서서 내려다보는 서울 달동네의 빽빽이 들어찬 집들은 그녀가 그에게 보여주기를 꺼렸던 적나라한 현실이자 두 사람의 좁힐 수 없는 차이를 보여주는 비정한 스펙터클이다. 명동은 그런 그녀에게 잠시 동안의 탈출구를 제공하는 춤과 음악의 공간이지만, 그 뒤편 술집의 비루한 공기를 비집고 들어선 수형의 멀끔한 양복이 주는 어색함은 다시금 그 격차를 상기시킨다. 그에 비해 두 사람이 어렵지 않게 결혼을 결심하고 마련한 보금자리는 자가용으로 운전해야만 들어갈 수 있는 교외의 큰 저택이다. 결국 정애는 문을 열지 못하고 그 앞에서 죽음을 맞는다. “문 좀 열어주세요”라는 그녀의 비극적 대사는 두 남녀의 ‘사랑’과 결혼의 비정한 현실을 환기시키는 정치적인 대사나 다름없다.

특정한 성취를 거둔 작품 한 편으로 볼 수도 있지만 굳이 이 작품에 ‘제3의 멜로’라는 이름을 부여하는 것은, 여기서 나타난 변화가 19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로 이어지는 멜로 장르를 설명하는 데 주효하다는 판단에서다. 영화와 방송 드라마 양쪽에서 자신의 영역을 개척한 김수현 작가의 작품들을 비롯해 이 시기의 멜로는 비로소 여성을 ‘어머니’나 ‘사랑의 포로’가 아닌 주체로 그려내기 시작했다. 그것은 어쩌면 이 장르를 향유하고 즐겼을 여성 관객 스스로의 변화와도 관련지어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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