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공포영화] 한국 공포영화의 새로운 시작 <여고괴담> 감독이 말하는 <여고괴담> 제작과정

by.박기형(영화감독) 2009-07-09조회 1,083
여고괴담

1997년 겨울, 낯선 남자의 전화를 받았다. <이방인>이란 영화의 오기민 프로듀서였다. 전혀 일면식도 없는 사람의 전화를 받고 나간 자리에서 시나리오를 한 편 받았고 장편영화의 연출을 제안받았다. 그것이 바로 <여고괴담>이다. 연출부 경험 몇 편과 이제 막 제대로 된 단편영화 한 편을 만든 삼십대 초반의 나에게 장편 영화 제안이 온 것은 정말 뜻밖의 일이었다. 어떻게 보면 큰 행운이었지만 그 제안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첫 번째 이유는 <여고괴담>이 공포영화였기 때문이다. 물론 처음에 기획을 듣고 관심을 보인 것도 <여고괴담>이 공포영화였기 때문이지만 말이다. 당시는 리얼리즘에 뿌리를 둔 영화나 코미디가 한국영화를 대표하던 시기였다. 그런데 그런 시기에 장편 호러영화를 기획하고 제작하려 한다는 것만으로도, 기본적으로 공포 스릴러 장르에 관심과 애정이 많았던 나에게는 아주 큰 매력이었다. 하지만 한국영화 역사와 시장에서 단절되어버린 장르인 공포영화를 막상 내가 만든다고 하니 겁부터 났던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여고괴담>이란 제목과 설정이 주는 일본색에 대한 부담이었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이조괴담> 같은 제목의 영화가 있었고 일본의 교육제도와 우리의 교육제도가 유사하긴 했지만, 왠지 일본에 있을 법한 영화를 차용한 듯한 느낌을 갖게 했다. 창의적이지 못한 기획 영화로 서둘러 감독 데뷔할 이유가 나에겐 없었다. ‘이건 내가 할 필요가 없는 거야’ 그래서 거절의 이유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가 입장을 바꿔 <여고괴담>을 하겠다고 결심하게 만든 건, 오기민 프로듀서가 나에게 보여준 신뢰와 애정이었다. 내가 만든 단편 <과대망상>을 보고 내 가능성을 높이 평가해준 것은 물론, 제작사와 투자사에서 추천한 연출자 대신 나를 적극 추천한 그의 노력에 감동했고, 결국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나에겐 위에서 언급한 두 가지 이유에 대한 답이 필요했다. 그래서 오기민 프로듀서에게 연출 제안을 수락하는 조건으로 두 가지를 요구했다. 시나리오 수정에 대한 전권을 달라, 그리고 일본에 다녀올 수 있는 시간을 달라. 오기민 프로듀서는 흔쾌히 수락했고, 나는 시나리오를 들고 일본으로 향했다. 내가 오기민 프로듀서에게 제안한 두 가지, 시나리오 수정에 대한 전권과 일본행은 나를 망설이게 했던 두 가지 이유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해서였다.

내가 만들고 싶은 공포영화는?

내가 받은 시나리오는 거칠었지만 공포영화 장르에 충실한 전형적인 시나리오였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공포영화와는 많이 달랐다. 나는 한국영화 역사에서 공포영화를 되살린다는 거대한 명분을 떠나 그냥 나만의 공포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나는 공포영화를 좋아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공포영화는 인간이 갖고 있는 ‘공포’라는 감정의 본질과 파장을 다룬 영화지, 단순히 시청각적 쾌감을 위해 ‘공포’를 이용하는 영화는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시나리오를 내 방식대로 수정하기로 결심했다. 또한 왜색 느낌이 드는 영화의 제목과 기획에 대해 실질적인 점검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일본으로 넘어가 수십 편의 비디오를 봤다. 학교가 나오는 공포영화를, 극장용이든 방송용이든 상관없이, 빌릴 수 있는 대로 빌려와 보고 또 봤다. 결론은 ‘내가 하고자 하는 <여고괴담>은 일본과 아무 상관이 없다’였다. 물론 <학교괴담>류의 공포영화가 있긴 했지만, 내가 만들려는 영화와는 전혀 달랐다. 이렇게 나는 일본행을 통해 자신감을 얻었고, 귀국하자마자 시나리오를 수정했다.

수정한 시나리오를 본 오기민 프로듀서는 처음엔 고개를 갸우뚱했다. 자신이 생각했던 영화와 조금 다를 거 같다는 느낌을 받은 듯했다. 하지만 그는 곧 나의 선택과 의지를 믿어줬고 이후 본격적인 작업이 시작됐다. 개봉일이 정해져 있어 모든 작업은 역산한 스케줄에 의해 진행되었다. 모두가 치열하게 전투적으로 임했지만 시간은 밤을 새우고 또 새워도 모자랐다. 결국 마지막 녹음을 앞두고 투자자인 강우석 감독을 만나 개봉을 조금 늦춰달라고 부탁했고, 강우석 감독 또한 내 의지와 뜻을 받아들여 개봉을 일주일 연기해주었다. 그렇게 2008년 초에 시작한 <여고괴담>은 그해 5월 마지막 주에 개봉하게 되었고, 결과는 모두에게 행복을 안겨줬다.

10년이 지난 지금, <여고괴담> 프로덕션 과정에서의 어려움이나 신변잡기 식의 추억을 새삼스럽게 다시 거론하고 싶지는 않다. 오래전에 만든 영화에 대한 추억을 돌이키며 낭만에 잠기기보단 지금의 작업이 나에겐 훨씬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고괴담>이 한국영화 역사 혹은 한국 영화산업에서 차지하는 가치와 의미는 짚고 싶다.

장르영화에 대한 진지한 접근

한국영화사에서 호러나 스릴러 같은 장르영화는 진지한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여고괴담>은 한국 공포영화의 역사와 시장을 되살리는 한편, 싸구려 기획 상품처럼 취급되던 장르영화에 대한 진지한 접근을 가능하게 했다. 단순한 하위 장르로 여겨졌던 호러 스릴러 영화의 미학적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가치와 의미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또한 새로운 시도를 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영화시장 구조에서 과감한 도전을 통해 성취를 얻어냈다는 것은 영화산업에서 <여고괴담>이 남긴 중요한 가치임에 틀림없다.

대부분의 경우, 시장에서 검증된 요소들을 갖고 영화를 제작하려 하지만 <여고괴담>은 시장의 평균적인 발상과는 상관없는 도전을 통해 탄생했다. 공포영화를 만든다는 상상조차 위험으로 여겨지던 시기에 과감한 선택과 투자를 통해 성공을 이끌어냈다는 사실은 10년이 지난 지금의 영화 제작 현실에서도 귀감이 되리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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