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이 글은 1970년대에 만들어진 테크니스코프 영화들 중 걸작을 소개해 달라는 청탁을 받고 쓰게 되었다. 하지만 내가 테크니스코프 영화를 다 본 것도 아니고, 그 영화들의 프린트가 현재 남아 있어서 볼 수 있는 상황도 아니어서, 어떤 영화가 걸작이라고 감히 말할 수는 없다. 결국 내가 어린 시절에 본 테크니스코프 영화들에 관한 기억을 떠올려 쓰는 글이 될 수밖에 없다. 그것도 네거 필름이 확인된 147편의 테크니스코프 영화 목록을 보고 ‘아하! 어린 시절 내가 본 그 영화가 테크니스코프 방식으로 촬영된 영화들이었구나’하면서 쓸 수밖에 없다.
내 기억으로 처음 본 테크니스코프 영화는 장승백이에 있던, 지금은 사라진 강남극장에서 본 영화다. 아마 초등학교 2학년 때인 것 같은데, 삼촌의 손을 잡고 커크 더글러스의 <바이킹>을 보러 갔다. 극장 안이 어두워지고, 수군거리던 사람들의 목소리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잔기침 소리가 잦아들고, 조용해지면서 본 영화를 상영하기에 앞서 예고편이 상영되었다. 커다란 스크린에는 어두운 밤 조선시대 풍경이 보이고, 두 사내가 서로 노려보고 있었다. 그들이 서로 몸을 부딪치며 격돌하는 순간, 붓글씨로 힘차게 휘갈긴 하얀 글자가 소용돌이처럼 뱅글뱅글 돌며 화면의 중앙에 날아와 박혔다. <인왕산 호랑이>!!! 그때 나는 대단한 충격을 받았다. 글자가 소용돌이를 치며화면 밖 어디에선가 날아와 스크린에 박혔다는 착시현상과 <인왕산 호랑이>라는 제목에서 받은 강렬한 느낌 때문이었다. 하얀 유도복을 입은 사내와 검은 옷을 입은 또 다른 사내가 엎치락뒤치락 대결을 벌이는 <인왕산 호랑이>의 예고편에 흠뻑 빠져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본편인 <바이킹>을 보고 나서도 <인왕산 호랑이> 예고편에서 받은 강렬한 인상 때문에 삼촌을 조르고 졸라 한 주 뒤에 다시 극장을 찾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본편 영화는 예고편만큼 인상적이지 않았고, 나는 그 영화에 대해 예고편의 소용돌이치는 제목의 인상밖에는 기억하지 못하고 말았다.
차리 셸의 매력에 빠지다
아마 그 즈음이었을 것이다. 스무 살 무렵의 꽃같이 아름다운 젊은 처녀였던 이모와 고모는 나를 데리고 극장엘 갔는데, 당시 극장 매점에서 크라운 산도 과자를 사줘서 일단 나를 순순히 말 잘 듣는 착한 조카로 만들어버리고는 극장의 좌석에 앉혔다. 극장 안의 불이 꺼지고, 나는 싸우는 장면이 하나도 안 나오는 영화를 난생처음 보아야 했다. 어두운 극장 속, 이모와 고모는 손수건을 쥐고 흐르는 눈물을 쉴 새 없이 닦아내며 영화를 보았는데, 어느 부분에서는 흐어엉! 하며 대성통곡까지 하는 것이었다. 지루해진 나는 졸다가 이모와 고모의 울음소리에 놀라 깨기를 반복하며, ‘속았다’고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영화란 것은 커크 더글러스가 닭다리를 한입에 베어 물고, 소뿔로 만든 술잔에 담긴 술을 입가와 옷에 줄줄 흘리며 호탕하게 마시고, 비극적인 대결을 하여 내 마음을 졸이고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던 나였는데, 주먹으로 해결해야 할 일을 말로 하고 젊은 남자와 젊은 여자가 나와 주구장창 이야기만 하고 나중에는 서로 껴안고 울고불고 하는 그런 영화, 이모와 고모는 하얀 손수건을 눈물로 적시며 우는데 난 왜 우는지 그 이유를 전혀 모르겠는, 그런 영화도 세상에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몇 해 전 우리 집에 놀러온 사촌 누나가 만화가게에서 만화를 빌려왔는데, 정말 재미가 없어서 전혀 볼 수 없는, 여자들만 잔뜩 나오는 만화여서 사촌 누나와 대판 싸우고 여자들이 보자고 하는 만화에 다시는 속지 않으리라고 결심했었는데, 바보 같은 나는 이모와 고모의 흉계에 빠져 크라운 산도의 바삭하고 달콤한 맛에 속아 한 시간 반 동안 극장 안에서 고독이란 두 글자를 가슴속에 새기고, 다시는 여자와 극장에 안 가리라고 결심했던 것이다. 물론 그 때의 결심은 지금도 흔들리지 않고 굳건해 여자와 극장 가는 일을 병원에 주사를 맞으러 가는 것만큼이나 무서워하고 있다. 남들은 그 영화를 재미있게 보고 심지어 대성통곡하며 울기까지 하는데 난 전혀 울거나 재미를 못 느끼며 어린 나이에 고독이란 단어를 알게 해준 영화의 제목은 아직도 가슴에 사무쳐 있다. <눈물 젖은 웨딩드레스>였다. 그 후로 <눈물 젖은 웨딩드레스>는 2탄 3탄이 나왔는데 길을 가다 그 영화의 포스터를 보고 그때 극장 안의고독이 떠올라 진저리를 치곤 했다.
그 후로 제법 머리가 크고 셋방살이 덕택에 이 동네 저 동네를 1년에 한 번꼴로 이사 다닌 덕분에 나는 초등학교 3~4학년 주제에 혼자 버스를 타고 돌아다니는 그런 능력을 획득하게 되어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이 호기심이 생기면 무조건 달려가 보는 소년이 되어 삼촌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혼자 동생들을 끌고 극장을 찾아다니게 되었다. 그 무렵 나의 가슴속에는 왕우와 이소룡, 찰슨 브론슨, 알랭들롱, 그리고 박노식이 자리 잡았는데, 그들의 영화가 상영된다는 포스터가 집 앞에 붙기만 하면 차비를 모아 아낀 돈이나, 참고서를 산다고 어머니를 속여 타낸 돈을 가지고 극장으로 달려갔더랬다. 왕우와 이소룡, 찰슨 브론슨이 나오는 영화가 매주 주구장창 개봉될 리는 없는 일이어서 그 틈새에 상영되는 비슷한 내용의 포스터만 보면 극장으로 달려갔다.
그래서 이소룡의 <용쟁호투>를 보러 갔다가 그 영화가 상영되는 극장을 도저히 찾을 수 없어서 본 <배신자>가 바로 내가 최초로 재미있게 본, 테크니스코프 방식으로 촬영된 한국 태권도 영화였다. 나팔바지에 꽉 끼는 비단조끼, 얼굴 반쯤 가리며 흘러내린 앞 머리카락을 입으로 훅 불어 넘기고 악당들의 뺨을 발로 정확하게 24번 후려 갈리는 차리 셸의 매력에 흠뻑 빠져 그가 나오는 영화들을 보았다. <돌아온 외다리> <속 돌아온 외다리> <대비상망> <분노의 왼발> <용호대련> <죽엄의 다리>가 모두 차리 셸이 나오는 영화였고, 내가 테크니스코프 영화에 대해 글을 쓰게 된 인연을 만든, 바로 그 영화들이었다.
나의 추억의 영화들, 테크니스코프
몇 해 전 영상자료원에서 한국액션영화 상영을 계획할 때, 나는 1960년대 한국의 액션영화들뿐 아니라 태권영화도 같이 상영해야 한다 생각하고, 상영 가능한 프린트를 알아보았는데, 차리 셸이 주연으로 나오는 태권영화의 프린트가 전혀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마침 특별전이어서 네거 필름이 남아 있다면 새로 프린트를 뜰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알아보았는데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방식으로 촬영된 영화들이어서 네거 필름이 남아 있지만 프린트를 뜰 수 없다는 답변을 들었고, 그 촬영 방식이 바로 테크니스코프임을 알았다.
통상의 촬영 방식은 네 개의 퍼포레이션에 한 프레임씩 촬영하는데, 그 안에 두 개의 프레임을 촬영하는 방식이었다는 것이다. 아! 절약정신. 따라서 프린트를 뜨기 위해서는 많은 난관이 있었고, 당시 테크니스코프를 현상하던 기계는 1970년 대 말 테크니스코프 촬영 방식이 사라지면서 함께 사라져버려 테크니스코프의 현상은 돈도 돈이지만 제대로 된 현상과 복원이 만만치 않은 일이란 것이었다. 그리고 그 테크니스코프 방식으로 촬영된 영화들이 내가 한창 한국 액션영화들을 다람쥐처럼 찾아다니며 본 그때의 영화들 대부분임을 알았다.
초등학교 5학년 무렵의 어느 날 나는 단칸 셋방 구석에서 신문에 난 영화 광고를 보고 얼굴을 붉히고 슬그머니 어머니에게서 등을 돌리고 앉아 그 매혹적인 영화 광고를 종이가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신문의 하단을 전부 차지한 대규모의 광고였는데, 그 넓은 지면에 대여섯 명의 여자가 홀딱 벗은 채 등을 돌리고 매우 에로틱한 자태로 서 있었고, 그녀들 가운데 웃통을 벗고 인상을 쓰는 사내가 독수리 발톱, 또는 호랑이 발톱처럼 손가락에 잔뜩 힘을 주고 정면의 적을 위협하고 있었다. 그 사내 바로 아래에 역시 붓글씨로 힘차게 휘갈겨 쓴 제목 <마지막 다섯 손가락>! 나는 등을 돌린 나체의 여자들에게 흠뻑 빠졌다는 것이 정답이겠지만, 사내의 호랑이 발톱처럼 힘을 준 손가락과 그 밑의 <마지막 다섯 손가락>이라는 제목의 조합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이미 몇 해 전에 <죽음의 다섯 손가락>을 아주 재미있게 보았고, 이 영화는 그 후 편쯤 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극장으로 달려갔지만 제기랄. 반라의 여자들은 안 나와서 매우 실망했다.
역시 신문 광고를 보고 혹해서 보러 간 영화 <빌리 쟝>이 기억난다. 집 앞의 포스터와 신문 광고에 여러 명의 흑인과 백인 무술가들이 등장해 한국 태권도와 겨룬다는, 당시로서는 국경을 초월한 전 세계적 액션영화라는 생각이 드는 영화였다. 하지만 영화에 등장하는 백인과 흑인들의 발차기는 정말 저 사람들이 태권도의 고수? 하는 의심을 살 만하게 앞차기를 하면 상대방의 무릎 정도에 가서 멎고 무엇보다도 실망스러웠던 것은 그들이 돌려차기를 하거나 앞차기, 옆차기를 하면 사흘 끼니를 제대로 못 먹은 사람처럼 휘청거려 마치 반푼이같이 보였다는 것이다. 악당들이 이 정도이니 아무리 주인공인 태권도의 사나이가 잘 싸워도 재미가 없었다.
또 하나 기억나는 테크니스코프 영화가 있다. 제목만 들어도 사내들의 짐승 같은 노린내가 물씬 풍기고, 1970년대 초, 한국영화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었던 카 체이스를 외국 차로 무려 두 대나 박살내면서 보여줘 우리들을 홀딱 반하게 했던 사나이 중의 사나이 박노식 주연의 영화다. 어릴 때 학교에서 집으로 가려면 방석집들이 200m 정도 죽 늘어선 길을 통과해야 했다. 싸구려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짙은 화장을 한 색시들이 가게 앞 걸상에 앉아 그날 밤의 영업 준비를 마치고 잠시 쉬며 담배를 피우고, 그녀들 뒤 벽에 붙어 있던 박노식의 인상 쓴 얼굴이 커다랗게 새겨진 <왜?>라는 영화의 포스터, 그 이상한 조합의 풍경에 와우산 너머로 지는 저녁 햇살이 그녀들과 박노식 영화의 포스터 위로 서서히 젖어드는 그 아름다웠던 풍경이 기억난다.
글을 쓰기 위해 받아든 테크니스코프 영화 목록은 어린 시절로 나를 날려버리는 타임머신이다. 테크니스코프 영화 한 편 한 편이 대단한 걸작들은 아닐것이다. 하지만 그 영화들은 1970년대 가난했던 그 시절 그때의 냄새이고 한국영화의 잊히거나 묻힌 반쪽이다. 147편 모두 다 단기간에 복원될 수는 없겠지만, 10년 후에라도 모두 다 복원되기를 기원하면서 복원 작업에 땀을 흘리는 영상자료원 식구들에게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