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무장지대 (박상호, 1965): ‘순수를 파괴하는 전쟁의 폭력’을 고발하다 걸작의 재발견

by.이용철(영화평론가) 2009-06-11조회 1,305
비무장지대

올리비에 아사야스가 연출한 <여름의 조각들>의 한 장면으로 시작하자. 아버지가 할머니집 벽에 걸린 인상파화가 코로의 그림을 보여주고 있다. 훗날 물려줄 거라며 자랑스러워하는 아버지에게 아들이 시큰둥한 태도로 말한다. “시대가 다르잖아요.” 아름다운 문화유산도 그런 취급을 받거늘 하물며 저주받은 유산의 경우라면 어떻겠는가. 광복과 6.25전쟁을 통과한 전쟁 세대는 ‘분단’과 ‘휴전’이라는 유산을 남겨놓았지만, 6.25전쟁은 작금의 젊은 세대에게 무관심의 대상이 된 지 오래다. 그런저런 사정을 감안하더라도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20세기의 한국에서 벌어진 가장 중요한 사건이 불과 100년도 지나지 않아 박제된 역사로 머물러 있다니 말이다.

언론학자 강중만은, 생존투쟁과 계급투쟁 속에서 여전히 또 다른 6.25전쟁을 겪는 중인 한국인의 의식의 심연에 자리 잡은 그 무엇을 ‘6.25 심성’이라고 불렀다. 사회학자 김동춘을 포함한 일군의 학자들이 ‘현대 한국 정치사회의 원형을 재생산해온 원형으로서 6.25전쟁의 과정’에 대해 계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이유도 다르지 않다. 본질적으로 미를 추구하는 예술가라고 해서 현실 인식의 영역에서 제외될 수 없다. 세대 간의 간극이 기억을 없애고 진실을 제거할 때, 시간을 불러내고 유의미한 주제를 풀어내며 못다 한 의무를 다하는 것도 예술가의 몫 중 하나다. 그리고 좋기로는 경험자가 말하는 것이 최고다. 1960년대의 수많은 걸작 한국영화 가운데 여러 편의 한국전쟁 영화가 포함되어 있는 건 우연이 아니다.

1970년대에는 국책영화라는 미명 하에 반공영화가 제작되면서 본질을 왜곡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나, 전쟁을 겪은 영화인들에게 6?5전쟁과 분단 상황은 분명 목마른 절규의 대상이었으리라고 본다. 그들의 진심을 느끼기 위해선 한 편의 영화 - <비무장지대>를 보는 것으로 족하다.

<비무장지대>는 1953년 7월 27일의 휴전협정 뒤 비무장지대에서 벌어졌음직한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떠돌이 소년이 물에 빠져 허우적대던 소녀를 구한다. 피난을 떠난 엄마를 찾아 38선을 넘는 두 어린아이는 오빠와 동생이 되어 험난한 여정을 함께하는데, 두 아이가 끼니를 때우려다 터뜨린 지뢰로 인해 유엔 측과 북한 측 사이에 긴장이 감돈다. 그런 상황일랑 까마득히 모른 채 군사분계선 주변을 맴돌던 두 아이는 북쪽으로 향하던 남자와 맞닥뜨리게 된다. 극영화 버전과 다큐멘터리 버전으로 각각 제작됐다고 전해지는 <비무장지대>(현재 볼 수 있는 건 다큐멘터리 버전이다)의 특색은 ‘반기록영화’라는 점이다. 양측의 긴급 정전회담이 개최되는 현장과 군인들의 동태를 담은 장면은 완벽하게 다큐멘터리 기법으로 찍혔으며, 그 외에도 군사정전위원회의 허락을 받아 비무장지대에서 처음으로 로케이션 촬영된 영화는 전쟁의 상처를 충실히 기록했다.

야생동물이 뛰어놀고 갈대가 무성한, 그래서 언뜻 평화로운 듯 보이는 광활한 공간 곳곳을 차지한 건 버려진 총과 탱크, 멈춰 선 기차, 뼈만 남은 시신, 파괴된 건축물 등이다. 이렇듯 기록영화로서도 충분히 인상적인 작품이지만, <비무장지대>를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전화의 저편>(1946), <독일 영년>(1948)처럼 리얼리즘에 바탕을 둔전쟁영화로 단순하게 분류하기란 힘들다. <비무장지대>는 금지된 공간에서 금지된 장난을 할 수밖에 없었던 두아이가 처한 상황을 빗댄, 뛰어난 상징성을 지닌 작품이기 때문이다. 소년과 소녀가 군사분계선의 아래 위에 금을 긋고 앉아 있는 장면이 대표적이라 하겠다. 땅을 가른 두 아이는 서로 적이 되어 말을 하지 않기로 하는데, 무서워진 소녀가 울자 소년은 분연히 선을 끊고 군사분계선 푯말을 뽑아버린다. 이어 카메라는 경계가 존재하지 않는 하늘을 무심하게 바라본다. <비무장지대>는 미니멀한 인물과 미니멀한 기법과 미니멀한 이야기로 전쟁의 진실을 시각화한, 정녕 놀라운 작품이다.

당시의 대다수 6.25전쟁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비무장지대>도 반공의식을 따르고 (소년을 죽이는 남파간첩을 통해) 공산주의의 비인간적인 측면을 드러낸다. 하지만 <비무장지대>는 상대 이데올로기를 무조건 비판하기 전에 기본적으로 반전을 주제로 삼은 작품이며, 영화의 기저에는 올바른 현실인식이 자리한다. 격렬한 전쟁, 용감한 영웅, 잔악한 적을 부각시키는 대신, <비무장지대>는 왜 죽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죽임을 당하는 소년과 그 죽음 앞에서 넋을 잃은 소녀를 애끓는 심정으로 바라본다. 언제나 전쟁의 첫 번째 피해자는 권력의 정반대편에 위치한 사람들이다. 난리통에 부모와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두 아이는 억울한 보통사람과 약자를 뜻하는 이름이며, 영화는 ‘보호받지 못한 순수’를 슬퍼하고 ‘순수를 파괴하는 전쟁의 폭력’을 고발한다. 그리고 <비무장지대>가 무엇보다 뛰어난 점은, (유엔군의 수장으로 행세하는) 미국이 한국의 분단과 전쟁에 끼친 막대한 영향과, 모든 비극의 빌미를 제공한 남북분단의 현실을 직간접적으로 그려냈다는 데 있다. 유엔군과 인민군이 위기에 처한 두 아이를 구하기는커녕 도리어 상대방을 비방하고 군사작전을 꾀하는 행태는 인간의 존엄성을 잃어버린 남북한 민중의 메타포에 다름 아니고, 영화는 두 아이가 결코 벗어나지 못하는 굴레인 군사분계선의 의미에 대해 되묻기를 내내 멈추지 않는다.

카메라가 군사분계선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동안 내레이션이 흘러나오면서 <비무장지대>는 끝을 맺는다. 감독 박상호는 “한 핏줄 한 민족이 겪은 피의 대가가 고작 이것이란 말인가. 하늘이여, 이 겨레의 앞날을 어찌하려는가. 피맺힌 이 민족의 절규를 언제까지, 언제까지 외면하려는가.”라며 목 놓아 운다. 하늘에 대고 민족의 비극을 원망하는 목소리는 세계 정치 상황 아래에서 미약한 나라가 어쩔 수 없이 치러야 했던 고통을 풀어낸 게 아닌가 싶다. 영화가 만들어진 그때와 같이, 휴전으로 말미암아 일상적인 전쟁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한국에선 영원한 평화가 요원해 보인다. 상처 입은 인간의 관점에서 전쟁과 분단에 접근한 <비무장지대>는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잉태했고 집약해놓은 사건을 과연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그뿐만 아니라 그 시대의 그 세대에게만 가능했던 작업을 참회록으로 완성했다는 점에서 전쟁의 재현과 시각화에 몰두하는 현대의 전쟁영화에 사려 깊은 질문을 던진다. 소중한 건 인간이고, 절대 잃어선 안 되는 건 휴머니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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