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현] 사랑을 전쟁터로 만들다 필모그래피로 본 김수현의 영화 세계

by.김한상(한국영상자료원 연구원) 2009-03-10조회 1,796
미워도 다시한번

1968년 김수현 작가가 ''그 해 겨울의 우화''로 데뷔한 그해, 가장 크게 흥행을 거둔 작품은 정소영 감독의 <미워도 다시 한번>이었다. 그 지난해 박정희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했고, 신성일 엄앵란의 발랄한 청춘 멜로는 어느덧 신영균 문희의 눈물 자아내는 순애보 이야기로 대체되었다. 아버지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젊은이들의 사랑이 식고 아버지의 실수 앞에 운명을 탓하며 눈물 삭이는 모자의 이야기가 뜰 무렵, 신예 작가 김수현이 나타난 것이다. 김수현의 작품은 시작부터 다른 무엇인가를 안고 있었다. 데뷔작 <저 눈밭에 사슴이>는 본처와 불륜녀의 기이한 동거와 파멸을 통해 우유부단한 가장이 초래한 파국을 폭로했고, <미워도 다시 한번>의 ''3편''으로 제작된 1969년 작품에서는 혜영 모자와 신호의 동거라는, 전작에서 볼 수 없던 파격을 이끌어냈다.

이처럼 맹아적인 양상을 보여주던 초기작을 지나 1970년대 중후반에 이르면 그녀의 멜로가 기존의 순애보로부터 명확하게 단절하는 지점을 볼 수 있다. TV에서 못다한 이야기를 영화로 옮긴 <청춘의 덫>이나 신예 원미경을 주연으로 발탁한 <너는 내 운명>에서 남자에게 버림받은 여성들은 ''복수''를 감행하고, 성공한다. <내가 버린 여자>와 <상처>에서는 사랑을 파멸로 이끈 것이 ''운명''이라고 불리는 모호한 어떤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계급적이고 성별(gender)적인 격차에서 빚어진 것임을 폭로하는 정치성을 발휘한다. 이것은 기존의 순애보적 멜로영화들이 심어놓은, 가부장을 위한 알리바이들을 모두 무효로 돌리면서 명백한 가해자로서의 남성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제기는 현상적인 수준에 머무르기보다 좀 더 발본적인 영역으로까지 들어가는데, 가령 <보통여자>나 <겨울로 가는 마차>에서는 표면적으로 합리적이고 이해심 많은 남성성조차 근본적으로는 소통과 화해가 불가능한 대상이라는 결론에 다다르고 있다. 유신 정권 말기라는 폭압적인 시기에 이와 같은 도발적인 문제제기가 가능했다는 것이 한편으로 놀랍지만, 한편으로는 이를 열렬히 지지했던 여성 관객(시청자)들의 욕구가 어떠했는가를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1980년대까지 계속된 그녀의 영화 작업은 경찰력과 법이 해결하지 못하는 남성 폭력에 연쇄살인으로 맞대응하는 어머니를 그려낸 <어미>에까지 이르렀고, <유혹>이나 <모래성>, <눈꽃>같이 그녀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 영화들은 작가와 함께 나이를 먹어가는 여성 캐릭터들을 입체감 있게 그려내었다.

이처럼 여러 편의 문제작을 만들어냈음에도 작가 김수현에 대한 영화사적 접근은 전무하다. 관객 동원력은 물론 사회적 파장도 컸던 그녀의 작품들이 여전히 영화사 서술에서 괄호 속 영역에 머무르고 있다는 점은 어쩌면 그녀의 작품들이 폭로하듯 ''남성적 합리성''의 체계가 만들어낸 공백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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