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매체, 테크니스코프의 비극 <70인의 여죄수>등 147편

by.오승욱(영화감독) 2009-03-10조회 1,044
70인의 여죄수

요새는 그런 극장들이 거의 자취를 감췄지만,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동시상영관이라 불리는 극장들이 동네마다 하나씩 있었다. 돈 없고 할 일 없는 가난한 아저씨들이나, 동네 노는 형들, 수업을 땡땡이 친 고등학생과 대학생, 빼먹으면 섭섭해 할 재수생 형님들이 주로 동시상영관에 가면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었고, 그런 형님들과 아저씨들 틈을 비집고 자리를 차지하고 영화를 보았던 나 같은 어린 꼬마도 엄격하게 관람 기준을 지키지 않는 동시상영관의 단골고객이었다. 저렴한 극장 입장료를 지불하고 두 편의 영화를 볼 수 있는 매력이 있어서, <배트맨>과 <어울렁 더울렁> 같은 한국 에로영화가 짝지어지면 그야말로 극장 안은 냄새나는 사내들 천지가 되고, <영웅본색2>와 <천장지구>가 짝지어지면 극장 안은 온통 씹다 버린 이쑤시개 천지가 되어버렸다.

1970년대,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어머니가 주는 용돈을 알뜰살뜰 절약해서 지금은 사라진 이대 입구의 대흥극장에서 매주마다 바뀌는 영화를 놓치지 않고 보는 것이 유일한 기쁨이었다. 담배 냄새와 아저씨들 냄새, 극장 옆 식당에서 풍기는 생선 굽는 냄새, 된장찌개 냄새 등등 온갖 냄새가 혼합되어 아주 이상한 냄새를 풍기던 그 극장에서는 항상 외국영화 한 편과 한국영화 한 편을 짝지어 틀어주곤 했는데, 외국이라고 해봐야 할리우드영화나 유럽영화, 홍콩영화가 전부였지만, 외국영화 한 편이 끝나고 한국영화가 상영되면, 어린 나는 항상 불만을 품었었다. 왜 저렇게 화면이 흐릿하지? 뭔가 우중충하고, 선명도가 떨어지고, 답답했다. 물론 극장의 좌석 여기저기에서 인디언들의 봉홧불처럼 피어오르는 동네 노는 형들과 아저씨들의 담배연기 때문은 절대 아니라고 어린 나이에도 생각할 머리는 있었기에 그 궁금증과 불만은 더욱더 커져갔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지만, 가장 큰 이유 단 하나. 돈이 없어서이지 않겠는가? 내가 한창 동시상영관을 찾아가 박노식과 챠리 셸이 나오는 한국영화를 보물 수집하듯 찾아내서 볼 그 당시, 개발도상국이었던 한국에 큰 시련이 닥쳐왔다. 석유 파동이었다. 당시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나는 석유 파동의 심각성에 대해 알 길이 없었고, 그냥 어른들의 한숨 소리와 뭔가 그럴듯해 보이는 파동이라는 단어만 기억할 뿐이었다.

한국영화가 한 해에 수백 편이 쏟아져 나오고, 신발공장에서 돈을 번 영화를 사랑하던 사장님께서 전주가 되어 영화를 만들다 신발공장을 거덜 내고 쪽박을 찼다는 그런 슬픈 전설의 시대, 그 좋았던 1960년대가 지나고 70년대의 한국영화는 안팎으로 시련을 겪었다. 그렇다고 영화를 안 만들 수는 없는 일. 그래서 그들은 묘안 하나를 짜냈는데 그것이 바로 테크니스코프라는 것이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네 개의 퍼포레이션을 차지하는 필름의 한 프레임을 둘로 나눠 두 개의 퍼포레이션에 한 프레임을 촬영하는 것이다. 이것은 필름 사용량을 두 배 절약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따라서 제작비도 두 배 줄어들어, 당시 테크니스코프로 영화를 촬영했던 이두용 감독께서는 찍어도, 찍어도 필름이 남더라는 훈훈한 상황을 맞게 되었던 것이다. 이 테크니스코프는 한 프레임 안에 들어갈 정보량을 두 개로 나눠 정보를 넣었으니, 당연히 화질이 떨어질 수밖에는 없었고, 내가 동시상영관을 쥐새끼처럼 드나들 그 당시 1972년부터 77년 무렵까지 극장 안의 안개 낀 풍경을 만들어낸 이유 중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화질의 문제 때문이기도 하고, 1970년대 중반에 이르러 한국의 경제는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서인지, 테크니스코프는 점차 극장에서 사라지고, 80년대에 들어서면서 자취를 감춰버린다. 하지만 가난 때문에 태어난 테크니스코프의 비극적 운명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더 이상 테크니스코프로 영화를 안 찍으니, 테크니스코프에 관계된 모든 기계들은 폐기처분되어 버렸다. 제작비를 절감하기 위해 푸대접을 받은 영화들, 말하자면 성인들의 오락물들이 주를 이뤄 액션영화나, 코미디영화, 공포영화, 청춘영화가 대부분을 차지하였기에 대단한 걸작이나, 어마어마한 흥행작도 없었다. 그러니 아무도 그 당시의 영화들을 찾지 않고, 프린트도 남아 있지 않고, 네거필름을 프린트로 만들 수 있는 기술도 없으니 자연스럽게 아무도 볼 수 없는 영화가 되어버리고, 한국영화사의 기억 속에서 망각되어 버린 것이다.

현재 영상자료원에 보관되어 있는 테크니스코프 네거필름 총 147편의 영화 제목들을 살펴보면 대개 1970년대 당시 푸대접을 받았던 액션영화들이 반 이상을 차지한다. 이두용 감독의 태권영화들이 모두 테크니스코프로 촬영되었고, 홍콩 권격영화의 붐 때문에 만들어진 한국 무술영화들 거의 다가 테크니스코프로 촬영되었다. 마초 남성 액션영화를 만든 김효천 감독의 제목만 들어도 사나운 사내들의 짐승 노린내가 풍기는 <늑대들>, <육군사관학교>, <집행유예> 같은 마초 액션영화와 <방범대원 용팔이>같이 가난한 사내들의 훈훈한 인정 미담물을 번갈아 찍었던 박노식 감독의 영화들. 이혁수, 고영남, 최영철, 권철휘 감독의 액션영화들도 거의 다 테크니스코프 영화들이다. 그뿐이 아니다. <70인의 여죄수>같이 제목만 들어도 1970년대 초 일본에서 흥행을 하여 홍콩까지 여죄수물의 붐을 일으켰던 <여죄수 사소리> 시리즈와 비슷한 냄새가 물씬 풍겨 "와! 여죄수가 70명이나 등장한다면 정말 대단하겠는걸." 하는 음흉한 호기심을 자극하는 영화도 있다. <그 얼굴에 햇살이>, <돌아와요 부산항>이나 <그건 너>, <나는 어떡하라고>처럼 당시 히트를 쳤던 유행가의 노래 제목을 사용한 영화도 있다. 1970년대 청춘영화의 붐 때문에 만들어진 <청춘을 맨발로> 같은 영화도 보인다. 아마도 제대로 된 대접을 받으며 촬영되었던 <바보들의 행진> 이후 또는 그 무렵에 만들어진 영화가 아닐까 싶은데 그 시대 청춘 군상의 또 다른 일면을 발견하리라는 헛된 기대도 품어본다. 1970년대 서울로, 서울로 올라온 꽃다운 청춘들이 식모살이를 하던 애환이 엿보이는 <여대생 가정부> 같은 제목도 보이고 이만희 감독, 임권택 감독의 영화들도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이만희 감독의 <청녀>는 당시 수배 중이었던 김지하가 시나리오에 참여했다는 확실치 않은 소문을 들어서 꼭 보고 싶은 영화였는데, 테크니스코프로 촬영되어 프린트가 남아 있지 않아 지금까지 볼 수 없는 영화이다. 테크니스코프 영화들의 제목을 보다 보면 1970년대의 가난한 풍경이 엿보인다. 그때의 영화인들이 칼같이 매서운 겨울바람이 몰아치는 어두운 새벽에 촬영 버스를 기다리며 국밥집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숟가락에 가득 퍼올린 뜨거운 선지와 밥알을 후후 불어가며 간밤에 마신 술로 시린 속을 달래는 그런 모습이 보인다. 고된 식모살이를 하다 일요일 날 주인집 가족들이 교회에 간 틈을 타서 같은 동네에서 식모살이를 하는 처녀들과 외출하여 극장으로 향하는 가난한 처녀들의 깔깔 웃음소리도 들리고, 오랜만에 포마드를 머리에 덕지덕지 바르고 시장에서 청바지 하나를 사서 입고 광낸 구두로 폼 잡으며 극장으로 향해 뜨거운 박노식의 액션과 챠리 셸의 발차기에 박수를 치는 철야와 잔업에 시달리며 기계 밥을 먹던 스무 살 청년들의 두툼한 손이 떠오른다.

이제는 자료실의 창고에서 잠자고 있는 이런 영화들이 복원되어야 한다. 비록 한국영화사에 꼭 거론되는 중요한 영화들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 영화들 하나하나에는 그 시대의 풍경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 때문이다. 몇 해 전 1970년대에 내가 좋아했던 한국 액션영화들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영상자료원을 찾았을 때 아주 이상한 경험을 했다. 내가 좋아했던 몇 편의 영화들, 그 중에서도 한국 태권영화의 매력에 빠져들게 만들었던 이두용 감독의 <배신자>라는 영화를 찾아보았는데, 그 영화의 자취를 찾을 수 없었다. 프린트가 없는 것은 당연했고, 네거필름도 행방이 묘연했다. 그런 영화가 없었나? 혹시 내가 꿈을 꾼 것인가? 분명히 나는 지금은 사라진 공덕동 로터리의 마포극장에서 땀내 나는 어른들 틈에 껴서 까치발을 하고 <배신자>라는 영화를 보았었는데, 챠리 셸이라는 멋진 서양식 이름을 가진 사나이에게 흠뻑 빠져버렸었는데, 영화 <배신자>는 네거필름이 확인된 테크니스코프 목록에도 자취가 없다. <배신자>는 내가 처음으로 한국 태권영화의 매혹에 빠져든 첫사랑인데, 혹시 그런 영화가 없었는데 내가 착각했던 것 아냐? 하는 아주 이상한 생각을 했었다. 그때 상영되었던 그 수많은 영화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는가? 영상자료원에서 망각되어 버렸던 테크니스코프 영화들이 복원된다는 소식은 너무나 반갑다. 영상자료원에 있는 147편 모두 다 복원하면 안 될까? 아마 힘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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