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현이라는 문화현상] 지배담론과 불화하는 보수적 세계관 (이택광)

by.이지영(한국영상자료원 카탈로깅팀) 2009-03-10조회 867
이택광

김수현 드라마는 기본적으로 보수주의자의 세계관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보수주의는 도시 중간계급의 욕망을 표현하는 세계관이다. 그러나 김수현의 보수주의는 도시 중간계급의 것이기 때문에 부르주아가 지배하는 상징질서에 복종하지 않는다. 김수현 드라마에서 추구하는 그 보수주의는 한국 사회의 지배담론과 불화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김수현은 이제 하나의 현상이라고 부를 수 있는 문화적 사건이다. 어떤 이는 그때도 김수현이고 지금도 김수현이라고 지적하는데, 의미심장한 말이다. 김수현은 한국 드라마의 표준을 만들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드라마에 내재한 논리와 의미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할 필요가 있는 까닭이다. 무엇보다도 나는 김수현 드라마에 숨어 있는 정치성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김수현과 정치성이라는 조합에 고개를 갸우뚱할 이들도 있을 것이다. 김수현의 드라마를 사회극이라고 볼 만한 근거가 희박하니 말이다.

그러나 김수현 드라마의 정치성은 드라마의 내용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형식성에서 발생한다. 김수현 드라마의 형식은 무엇인가? 많은 이들이 인정하지만, 김수현 드라마의 핵심은 갈등이다. 겉으로 보기에 이 갈등은 형식을 위해 복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갈등 자체를 형식이라고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갈등구조 없는 김수현 드라마는 존재할 수가 없다. 김수현 드라마가 이 형식에서 이탈했을 때, 흥행은 대체로 실패했다.

김수현은 갈등구조를 잘 드러내는 작가로 정평을 얻었다. 이런 갈등구조는 종종 파격성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김수현 드라마의 정체는 이런 갈등의 지속에서 찾을 수 있다. 이 갈등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단순하게 김수현이라는 작가의 취향인가, 아니면 관객의 요구인가? 김수현 드라마의 재능은 이런 갈등구조를 ''극장화''한다는 것에 있다. 이른바 사드가 만들어낸 도착의 극장과 유사하다. 사드는 쾌락을 위해 억압을 극장화하는데, 김수현의 드라마도 이런 방식으로 시청자(관객)의 관심을 집중시킨다.

어떤 이들은 <엄마가 뿔났다>에서 김수현이 달라졌다고 말한다. 이런 견해는 대체로 "엄마를 전면에 내세워 가부장적 남성 중심으로 드라마를 전개해 왔던 기존 노선"을 바꾸었다는 점을 근거로 내세운다. 그러나 이런 평가는 기존에 김수현 드라마를 ''가부장적''이라고 비판했던 관점을 반영한 것이다. 김수현의 관점은 <엄마가 뿔났다>를 계기로 바뀐 것이라고 보기 어렵다. 이미 <내 남자의 여자>에서 이런 징조는 있었고, <청춘의 덫>이나 <겨울로 가는 마차>에서도 ''여성''은 남성의 운명을 주도하는 인물이다. 이런 맥락에서 김수현 드라마는 도시 중간계급 여성을 위한 로망스이다. 김수현 드라마에서 드러나는 갈등은 이런 중간계급의 불안과 분노를 드러내는 형식적 구조이다. 박정희 시대부터 오늘날까지도 김수현 드라마가 인기를 끄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다. 김수현 드라마가 조응하는 것은 도시 중간계급의 욕망이고, 이들의 정체성을 위해 그의 이야기가 복무하는 것이다.

그의 드라마는 대체로 가족과 섹슈얼리티라는 두 축을 왕복하고 있다는 특징을 갖는다. <청춘의 덫>의 경우도 강렬한 가족주의가 매개 역할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섹슈얼리티의 문제이다. <청춘의 덫>은 ''시기(envy)''에 대한 이야기이다. 상대방이 은밀한 쾌락을 즐기고 있다는 의심에서 시기는 발생한다. 이런 시기는 상대방의 주이상스(jouissance, 향유)에 대한 질시를 내포한다. 윤희는 동우에게 ''아버지의 역할''을 강조하지만, 현실에서 합리적으로 설득력을 갖는 주장은 아니다. 동우의 욕망은 현실의 한국 사회가 ''인준''한 정당한 욕망이다. 김수현 드라마가 현실과 긴장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이 지점이다.

<사랑과 야망>(1987)에서 김수현은 가족주의를 넘어서 있는 태준의 ''야망''을 파멸에 이르는 것으로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는 극명하게 부르주아와 갈등하는 도시 중간계급의 욕망을 드러낸다. 이 욕망을 구현하고 있는 실체가 바로 가족이다. 김수현에게 가족의 의미는 생물학적 친연성으로 구성할 수 있는 ''친족''의 개념을 넘어선, 가치체계의 중심에서 판단의 준거로 작동하는 상징적 가족을 의미한다. 이 가족은 한국 사회의 근대화가 몰고 온 변화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절대적 ''가치''이기도 하다.

김수현 드라마는 이처럼 부르주아적 가치관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낸다. 그리고 이런 가치관은 남성의 ''야망''과 같은 것이기도 하다. 김수현이 부정적으로 그려내는 ''남성적 야망''은 가족을 등진 것이다. 김수현의 도덕체계를 구성하는 기준은 바로 가족이다. 그러나 김수현은 가족과 갈등하는 여성의 욕망에 대해 훨씬 관대하다. <청춘의 덫>에서 혜림의 죽음은 윤희에게 도덕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보장해 주기 위한 장치이다. <불꽃>에서 종혁(차인표 분)에 대한 지현(이영애 분)의 배신은 아무런 저항감 없이 ''용서''를 받는다. <불꽃>은 <내 남자의 여자>와 함께 가장 문제적인 김수현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김수현 드라마에 등장하는 ''남성''과 ''여성''은 생물학적인 차원을 넘어서 있다. 김수현 드라마에서 남성과 여성은 섹슈얼리티에 대한 두 가지 태도에 지나지 않는다. 남성적 야망에 대한 김수현의 도덕적 판단은 여성이라는 기표로 표상할 수 있는, 섹슈얼리티에 대한 금지이다. 이 금지는 김수현 드라마를 구성하는 하나의 증상이다. 김수현 드라마에서 부르주아는 언제나 ''남성적''이며, 이와 대립하는 도덕적 주체는 항상 ''여성적''이다. 그리고 이 둘 사이에 ''허달삼''이나 ''나영일'' 같은 현실원칙이 존재한다. 이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김수현 드라마에서 갈등을 만들어내는 ''남성''과 ''여성''은 현실 원칙 너머에 있는 ''그 무엇''인 것이다.

김수현 드라마는 기본적으로 보수주의자의 세계관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보수주의는 도시 중간계급의 욕망을 표현하는 세계관이다. 그러나 김수현의 보수주의는 도시 중간계급의 것이기 때문에 부르주아가 지배하는 상징질서에 복종하지 않는다. 김수현 드라마에서 추구하는 그 보수주의는 한국 사회의 지배담론과 불화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왕당파였으면서도 그 계급의 몰락을 누구보다도 사실감 있게 그려낸 발자크처럼, 김수현은 보수주의자이면서도 선명하게 보수주의의 불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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