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하길종을 처음 만난 것은 1970년의 어느 여름날 명동의 찻집 코지코너에서였다.
마침 자리에 있던 소설가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김승옥이 미국에서 영화를 전공하고 귀국한 하길종을 내게 소개한 것이다. 하길종은 한국에서 영화 작품활동과 평론활동을 병행할 것이라고 했다. 장발에다 블루진 차림의 하길종에게서 풍긴 냄새는 히피족의 자유분방한 말씨와 행동이었다.
내가 하길종과 영화적 동지 의식을 느끼게 된 계기는 1972년 이른바 「영화<화분>논쟁」에 참여한 때부터였다. 논쟁의 발단은 조선일보사가 주최한 제9회 청룡영화상 심사에서 출품작 중 하길종 연출의 <화분>이 「한국 영화의 보수성에 눌려 본격적인 검토도 받지 못한 채 밀려났다」는 동아일보 기사에서 비롯되었다. 이에 대한 심사위원 유한철의 「청룡 영화 심사 이론의 답한다」, 하길종 감독의 반론 「영화를 보는 눈」, 그리고 변인식의 「영화적 색맹성」이 「<화분>옹호론」에 가세 당시 잠잠하기만 했던 영화가에 논쟁거리가 되었었다. 이 무렵 저녁나절이 되면 남산에 위치한 유프로덕션(대표 유현목)에 젊은 영화인들인 하나 둘씩 모여들었다. 그 자리에 개근생으로 하길종 감독 김호선 감독, 이장호 감독 그리고 변인식이 있었다. 1975년 하길종은 전작 <화분>과 <수절>의 흥행실패로 절치부심하고 있었다. 그는 사돈이기도 한 영화제작자 박종찬(영화배우 하명중의 장인)이 제작한 영화 <바보들의 행진>의 연출을 맡고 심기일전 의욕에 불타있었다. 영화의 소재가 대학 캠퍼스인 만큼, 엑스트라 역시 충무로에 있는 기성들 보다는 직접 대학을 찾아가 싱그러운 학생 엑스트라군을 모아 오겠다는 것이었다. 하길종은 즐거운 표정으로 「변형도 내 영화에 출연할 수 있어」하는 것이었다. 촬영장소는 당시 시설이 뛰어난 경희대학 야외 캠퍼스였다.
촬영장에 제일 먼저 도착한 하길종이 나를 보자 「오늘 촬영에 변형이 노교수역으로 출연해야겠어」하길래 나는 다소 놀라서 「내가 까메오로 나온다 이거지…」하고 확인했다. 촬영 스케쥴은 영자역의 이영옥이 남자친구 병태의 캠펴스로 찾아와 철학과 건물을 묻는 장면이었다. 촬영은 명카메라맨인 정일성 감독이 맡았다. 드디어 촬영이 시작되었다. 언덕 아래에서 이영옥이 경쾌한 발걸음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나는 꾸부정한 자세에 책가방을 옆구리에 낀 채 언덕 아래로 내려가는 동작이었다. 하길종이 「레이디…액션!」하고 외쳤다. 카메라는 내 뒤통수를 훑고 있다가 영자가 묻는 말에 답하는 동작에서 고개를 돌려 손가락으로 건물을 가리킬 때 몇 초 가량 얼굴이 노출되었다. 그 뒤 시사회장에서 내 얼굴을 알아본 기자들이 한바탕 웃어대는 통에 다소 민망스럽기는 했지만, 좋은 현장 경험을 하여 흡족했다. 그날 저녁 하길종 감독과 나는 기독교 방송의 심야프로인 「꿈과 음악 사이」에 출연 이 얘기 저 얘기하던 끝에 사회자가 불쑥 내게 「출연료는 얼마나 받으셨는지요…」라고 물었고, 나는 「안 받았는데요」라고 답했다. 그런데 마침 이 방송을 제작자인 박사장이 직접 듣고 두툼한 출연료 봉투를 내게 보내왔다.
이날 밤 하길종과 나는 모처럼 친구들을 명동으로 불러내어 한 턱 단단히 쏘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