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하길종] 이 나쁜놈아, 네 맘대로 죽어? 나와 하길종, 김호선(영화감독, <겨울여자> 등)

by.김호선(영화감독) 2009-01-15조회 2,688
김호선감독

하길종을 기억하려면 우선 나는 술을 마셔야 한다. 울컥 치미는 분노 비슷한 오만가지
감정과 ‘시대의 피고’로 살아남은 자로서 느끼는 부끄러움까지 범벅이 되어, 몹시 씁쓸하고
외로운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1979년 2월 27일 저녁 무렵,
겨울의 끝자락이라 유난이 춥고 바람 또한 드세게 부는 날이었다.
하길종으로 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오늘 원고료 받았으니 한잔 하자는 거였다. 그가 글 쓰는 장소로 이용하는 충무로 사이드에 있는 이화장 옆 길모퉁이에 조그마한 맥주집이 그의 단골집이다. 그가 원고료 받는 날이면 어김없이 술판이 벌어진다. 주 고객으로는 유현목, 변인식, 김승옥, 홍파, 임명관 그리고 본인 등이다
그날따라 온몸이 들쑤시고 몸살이나 한잔하자고 채근하는 그에게 핑계를 대고 집으로 갔다.

그것이 하길종과 마지막 이였다.

새벽에 비보를 전해 듣고 통금 해제 되자말자 모 대학병원으로 달려갔다.
산소 호흡기를 끼고는 있었지만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내 눈을 아프게 한건 여위고 앙상한 그의 맨발이었다. 왜 양말을 안 신었을까..이 추운겨울에? 발이 시려 울까봐 두 손으로 마구 비벼주는데 냉기가 내 몸에 전이되며 내 가슴이 서늘해진다.
아! 이제 하길종은 우리 곁을 떠난 거구나! 난 비명처럼 ‘이 나쁜 놈아! 네 맘대로 죽어?’
통곡했다 그리고 후회 했다 전날에 만났으면 그의 마지막 모습이라도 봤을 텐데..아니 내가 있었더라면 안 죽었을 지도 모른다. 아쉬웠다
하길종에게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이를 닦지 않는다.(대신 껌 씹음) 목욕하지 않는다. (속옷만 갈아입음) 어떤 약이든 먹지 않는다.(그가 떠난 후 바바리코트 주머니에는 혈압약이 가득했고 결국 혈압으로 세상을 떴음)

그의 장례를 치룬 후, 거의 3년여 동안 나는 하길종의 악몽에 시달렸다. 내가 잠들라 치면 그는 내 옆에 앉아 있다. 아니면 문밖에서 나를 손짓하며 부른다. 따라 가다보면 그는 사라지고 없다. 어디를 가던 내가 가는 곳에 항상 그가 있다. 너무 외로워서.. 혼자 죽은 게 억울해서 날 데려 가려는 건가? 한동안 난 불면증에 시달렸다.

1972년 유현목감독(본인 조감독시절)이 미국무성초청으로 다녀오는 길에 UCLA에서 하길종을 만났다고 했다. 매우 똑똑한 청년이며 그가 한국에 오면 우리영화계에 많은 변화가 있을 거라고 예고했다. 나는 내심 그를 기다렸다. 국내에서는 해외영화에 대한정보도, 세계적 감독들의 작품도 접할 수 없는 터라 그에게서 많은 영향 받을 것을 기대했다. 당시에도 유학파 감독들이 있긴 했지만 영화계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학교로 뺑소니쳤다.
그러나 하길종은 달랐다. 그는 한국에 오자마자 이효석 원작의 <화분>을 준비했고 나에게 동참해 달라고 했다. 나 역시 원했던 바라 그의 조감독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순탄치가 않았다  충무로 현실에 적응 못해 시행착오의 연속이다. 유영길(촬영-고인)과 나하고 까지도 트러블이다. 촬영, 중단, 촬영을 거듭하면서 1년여 세월 끝에 난 감독 데뷔하기위해 하길종을 떠났다. 그 후 얼마 안 돼 우리는 ‘영상시대’의 동인으로 하길종을 다시 만났다.

유현목감독 소개로 처음 만났을 때, 듣던 거와는 달리 나는 그저 천사 같은 눈을 가진 왜소한 사내가 참 계집애처럼 웃는구나. 했었다. 그 대단하다는 UCLA에서 샘페킨파, 코폴라와 공부하고 인정까지 받은 유학파라니 드럽게 잘났다고 거들먹거리겠구나, 맘속으로 질투 섞인 조소를 날리고 있었는데, 그러나 영화와 문학을 화제로 입을 열자마자 그 천사 같은 눈빛엔 독기가 스미고, 말끝엔 가차 없는 독설이 쏟아져 나와, 목표물에 정확히 박히는 돌팔매처럼 모든 것에 퍼부어지는 것이었다. 영화판에 뛰어들어 오로지 영화 한편 만들어보는 게 소원이던 나에게, 하길종은 『연출작업 자체가 하나의 참배다』라는 베르히만 감독의 말을 읊조리며 문화충격을 안겨준 별종이었고, 영화를 하는 일이 인간과 세상에 대해 끝없이 사유하고 고민해야 하는 작업임을 일깨워 준 ‘영상시대’의 동지였다. 만나면 곧바로 이어지던 숱한 술자리들. 술에 취하면 그는 그 시대의 독재와 권력, 정신을 능욕하는 무자비한 검열. 정부시책에 따라 국책영화나 만들며, 일수놀이 하듯 영화 혼을 파는 돛대기 시장 같은 영화판, 또한 권력에 빌붙는 무기력한 지식인들, 비겁함으로 살아남는 모든 목숨들을 향해 독설을 퍼부었고, 싸움을 걸었다. 그러나 그런 그의 모습은 언제나 외롭고 슬펐다. 힘없는 작은 사내가 도시 구석의 남루한 술집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비슷하게 남루한 젊은이들에게 자유의지와 예술혼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억압과 타협하는 “모두는 이 시대의 피고다!” 한들 그 외침은 바위 같은 시대의 벽에 부딪쳐 되돌아와 오히려 여리디 여린 자신의 몸과 정신을 휙 쑤시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약지도 못하고 타협할 줄도 모르는 그는 검열관가 싸우고, 행인과 싸우고, 영화인과 싸우고, 자신과 싸우고, 싸우면 주로 얻어터지면서도 싸웠고, 매일매일 커지는 분노는 매일 양식처럼 뇌관을 채웠다. 그렇게 폭풍 같고 돌풍 같은 열정과 영민함, 번뜩이는 상상력, 멈추지 않는 사유의 폭을 지닌 뛰어난 재능의 감독 하길종은 우리 안에 갇힌 짐승처럼 혼자 으르렁대다 그 재능을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팡! 뜨거운 뇌의 핏줄이 터져 버렸다.

그랬다.
그 시대는 서슬 퍼런 유신시대였다.
모든 창작물엔 검열에 검열이 이어지고, 정부나 정책을 비판하면 사상범으로 몰렸으며,
사회의 어두운 면엔 절대 카메라를 들이대서는 안 되는 불문율이 암묵적으로 지켜지던 시대. 반공영화나 새마을영화 같은 국책영화가 권장되었고, 비슷한 신파영화들만 양산되어
보따리 장사하듯 팔리던 시대였다.
‘저에게 왜 좋은 영화를 만들지 못하느냐고 묻지 마십시오.
저는 그냥 이렇게 버티고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뿐입니다’
라고 했던 하길종의 말이 단순히 변명이 아니라는 것이 이해될 것이다.

유학에서 돌아온 하길종은 72년 가족의 붕괴를 통해 한국사회를 우회적으로 비판한<화분>으로 데뷔했지만, 그의 실험적 영상은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했다. 신파 스토리에 익숙한 한국관객에겐 너무도 낯설고 기괴한 영화에 불과했고, 권위적인 당시 한국 영화계로 부터도 철저히 외면당했다. 관념적 상징만으로는 사회와의 소통과 교감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을 안 하길종은 어떤 방법으로 관객과 만나야 하는지를 고민하고 절망했다. 그리고 두 번째 영화 <수절>은 가장 아끼는 부분들이 검열에서 마구잡이로 잘려나가 기승전결도 애매한 기형아로 세상에 나와야했다. 그때 피터지게 검열관과 싸우고 손발이 잘려나간 기분이라던 하길종의 모습이 새삼 아프게 떠오른다. 자신이 만들고 싶은 영화를 만들지 못하면서 그가 영화의 상업성과 화해한 것은 세 번째 작품  <바보들의 행진>부터이다.

반전, 평화 등 자유주의의 물결이 거셌던 1960년대 후반을 미국에서 지냈던 하길종은 <바보들의 행진>을 통해 자유주의 정신을 심으려했고, 탈출구 없는 젊음들의 방황을 그리며 닫혀있던 그 시대를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바보들의 행진>은 당시 암울한 시대 속에 억압되어있던 젊은이들에게 신선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풋풋하고 희망적이어 야할 젊음들이 어떻게 꿈을 잃고 시들며 마모되어가는지를 낭만이란 겉포장 속에 끼워 넣은 이 영화는 그러나 검열에서 40분이 넘게 잘려지고, 영화 속에 삽입된 노래 <고래사냥>,<왜 불러>가 당시 대학가 시위현장에서도 불린다는 이유로  결국 ''시의에 부적절하다''는 판정을 받아 금지곡이 되고, 하길종 또한 정보기관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

 그 후 <여자를 찾습니다> <한네의 승천> <속 별들의 고향> <병태와 영자> 등 작가주의 와 상업주의 사이에서 길을 잃었던 그는 병태와 영자를 만들고 나서 이제부터 시작이다. 이젠 정말 만들고 싶은 영화를 만들 수 있을 것 같다.라고 했는데, 79년 2월 진눈깨비 오는 날 세상을 결국 떠났다. 긴급조치시대에 그의 시계가 영원히 멈춰버린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하길종은 참으로 순결한 어린아이 같은 사람이었다.
그럼 면에서 나는 40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를 질투한다.
영화를 하며, 그의 뼈있는 독설에 길거리에서 치고받고 뒹굴며 싸우기도 했고, 왜 영화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견이 엇갈려 이를 갈기도 했지만, 청춘의 한 부분을 동행한 친구로 그는 정말 아름다웠고, 경이로운 사람이었다. 나를 ‘피고’라고 부르던 그의 목소리조차도
때론 너무도 그립다.

영화를 하며 수많은 벽에 부딪힐 때 하길종을 생각하곤 한다.
왜? 무엇을? 어떻게? 하고 묻게 하는 힘.
그게 한국영화의 역사에서 하길종이란 네임이 지닌 힘이 아닐까?   

하길종이 쓴 글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모든 예술행위가 그렇듯이 인간의 편에 서있지 않는 작품은 일체가 사이비다.
정부도 그렇고 영화는 더욱 그렇다!’
그의 말을 다시 곱씹어 본다. 
1000만 관객 동원 시대에, 관객은 있고 영화는 없는 시대에 그가 그리운 이유는 뭘까?
우리가 한번 그의 영화 혼을 되새겨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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