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영화감독과 스태프 1세대, 그 험난했던 첫 걸음 한국영화박물관, ‘여성영화인의 탄생’ 코너

by.최소원(한국영상자료원 연구원) 2009-01-16조회 2,934

1990년대 이전까지 영화제작은 여성으로서 접근하기 힘든 현장이었다. 한국영화박물관은 상설전 ‘한국영화 시간여행’안에 ‘여성영화인의 탄생’이라는 코너를 두고 여성영화인의 역사의 첫 장을 장식하고 있는 영화감독 박남옥, 각본가이자 감독이었던 홍은원, 편집기사 김영희, 의상 스태프 이해윤을 조명하고 있다.

최초의 여성감독 박남옥이 만든 <미망인>(1955)

‘호탕하고 보기 드문 술고래로 함께 영화 이야기로 밤이 새는 줄 몰랐던, 영화 밖에 모르는 사람’이라고 유현목 감독이 회고하는 영화 동료가 바로 최초의 여성영화 감독인 박남옥이다. 경북 하양 출신으로 결혼을 강요하는 집안에 맞서 학교를 자퇴한 후 대구에서 신문기자로 일하다 해방 후 친구의 남편이던 윤용규 감독의 소개로 조선영화사 촬영소에 입사해 편집과 스크립터 일을 하며 영화를 시작했다. 한국전쟁 중에는 부산에서 국방부 촬영부 소속으로 종군영화를 만들었고 이때 극작가 이보라를 만나 결혼했다. 투포환 선수출신의 체력과 영화에 대한 끈질긴 열정을 지녔던 박남옥이 ‘최초의 여성감독이 만든 영화’, <미망인>을 완성하기까지 겪었던 고초는 너무나 혹독했다. 제작비 조달을 직접하며 갓 태어난 딸을 맡길 곳이 없어 등에 업은 채 메가폰을 잡았다. 또한 제작비가 부족해 번번이 촬영이 중단되는 상황에서 스태프들에게 밥을 해먹여가면서 결국 영화를 완성했다. 전쟁미망인의 문제를 딸에 대한 모성과 여성으로서의 욕망에 대한 갈등으로 접근하면서도 담담한 태도와 진지함을 잃지 않았던 박남옥 감독은 단 한편의 연출작 만을 남겼지만 ‘여성영화감독’으로서 의미 있는 첫 걸음을 디뎠다.

30년 동안 영화계에 몸담았던 각본가, 감독 홍은원

‘두 번째’ 여성영화감독의 탄생 역시 쉽지 않았다. 학창시절 프랑스 영화에 심취했던 가냘픈 문학소녀 홍은원은 만주국 신경음악단 소속 가수로 활동하다 영화계에 인연이 닿았다. 1947년 최인규 감독의 <죄없는 죄인>의 스크립터로 영화 일을 시작한 홍은원은 이강천, 전창근, 유두연, 윤봉춘 등의 조감독을 거치고, <유정무정>(1959), <젊은 설계도>(1960), <황혼>(1960), <바위고개>(1960) 등의 시나리오를 썼다. 15년간 스크립터와 조감독 생활 끝에 <여판사>(1962)로 감독 데뷔했다. 다른 감독들에 비해 지나치게 늦은 데뷔였다. 당시 화제가 되었던 ‘홍일점’ 여판사의 죽음을 소재로 한 실화를 ‘홍일점’ 여성감독이 연출한다는 것 자체에 홍보효과를 노린 점이 작용했다고 하지만, 오랜 조감독 생활을 하며 ‘오히려 중견감독들을 길러냈다’는 평을 받았을 정도로 연출 능력을 인정받았다. 이후 <홀어머니>(1964), <오해가 남긴 것>(1965)을 감독했고, 1959년 <유정무정>을 비롯해 13편의 시나리오를 썼으며 그 중 9편이 영화화되었다.

한국영화 역사의 굴곡과 함께 한 편집기사, 김영희

김영희는 일제 식민지 시기부터 뉴스영화를 주로 생산했던 전쟁기와 해방기를 거쳐 1960년대 ‘한국영화 황금기’의 중심에 서 있었으며 1970년대까지 현역으로 활동하며 수백편의 영화를 편집한, 그야말로 한국영화의 역사를 고스란히 살아낸 영화인이다. 식민지 시기 큰언니의 남편인 촬영기사 양세웅의 소개로 사단법인 조선영화주식회사에 입사해 인화와 현상을 익혔고, 편집 1세대 양주남의 편집조수로 일하면서 네가 편집을 시작했다. 미군정청 공보부 영화과, 미공보원(USIS), 진해의 해군 교재창 등에서 수백편의 문화영화, 뉴스영화, 기록영화, 극영화를 편집했고, 한국전쟁이 끝난 후부터는 본격적으로 극영화 현장에서 약 27년간 전문 편집기사로 활동하며 여성영화 기술인의 역사를 시작했다. 조카인 박양자와 양성란 등의 후진을 키웠다.

영화의상 분야의 개척자, 이해윤

195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50년간 제작된 거의 모든 사극 영화는 이해윤의 손을 거쳤다. 1925년 서울 생으로 어릴 적부터 손재주가 있었고 편물점을 운영하기도 했던 이해윤은 우연히 조감독 시절의 유현목, 백호빈을 알게 되어 <춘향전>(1955, 이규환) 촬영현장에 구경 갔다가 엑스트라로 출연했고, <자유전선>(1955, 김홍)에서는 비중 있는 역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단종애사>(1956, 전창근)에서부터 의상을 맡아 배우 임운학과 식민지시대 배우에서 분장으로 전향한 김일해의 도움으로 의상은 물론 분장까지 맡아 했다. 이후 <왕자호동과 낙랑공주>(1956, 김소동), <돈>(1958, 김소동), <연산군(장한사모편)>(1961, 신상옥), <폭군연산>(1962, 신상옥) 등 흑백영화에서부터 화려한 의상이 돋보이는 대규모 스케일의 칼라 시네마스코프 사극 등 매년 십여 편의 영화 의상을 맡았다. 바늘과 실, 미싱과 함께 한 이해윤의 영화인생은 2001년 신승수 감독의 <아프리카>까지 반세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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