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액션영화를 말할 때, 최근 학계에서도 점차 연구가 진행 중인 대륙활극과 다찌마와리 액션영화의 틈바구니 속에서 전혀 주목받지 못한 영역이 있다. 바로 홍콩의 이소룡이 <당산대형>(1971)으로 시작해 <사망유희>(1978)로 짧고 굵게 영화인생을 마감하던 그 무렵, 그리고 성룡의 <취권>(1978)을 위시한 코믹 쿵푸 장르가 태동하던 그 즈음, 그러니까 이소룡과 성룡으로 대표되는 홍콩 무술영화가 국내는 물론 아시아 극장가를 호령할 때 한국판 이소룡과 성룡을 꿈꾸며 등장했던 수많은 ‘짝퉁 무술영화’의 계보다.
가장 화려했던 배우는 바로 황정리다. 당시 이두용의 <무장해제> 촬영장을 방문하기도 했던 홍콩의 제작자 겸 감독 오사원은 황정리를 눈여겨보고 홍콩으로 초청했고, 그는 성룡 주연의 <사형도수>(1979)와 <취권>(1979)에 상대 주인공 악역으로 등장하며 인기를 누렸다. 물론 그 이전에 한국에서 건너 간 김태정이 당룡이라는 예명으로 이소룡 사후 촬영이 중단됐던 <사망유희>(1978)에 이소룡 대역으로 출연해 완성한 경험이 있으며, 그보다 앞서 <맹룡과강>(1972)에서 이소룡과 대결을 벌였던 황인식은 황정리처럼 <사제출마>(1980)와 <용소야>(1982)에서 상대 악당 두목으로 등장해 가공할 발차기를 선보였다. 더 거슬러 올라가자면 장철의 <13인의 무사>(1970) 등에 출연한 김기주, 남석훈 등은 그들보다 앞서 쇼브라더스 영화에 초청받은 배우들이다. 이후 국내로 복귀한 그는 이두용의 <해결사>(1981)에서 현재 영화인협회 이사장이자 대종상 집행위원장이기도 한 신우철과 함께 주인공을 맡게 된다.
액션영화에 대한 대중들의 사랑이 점차 소멸돼갈 1980년대 초반, 그러니까 이소룡과 성룡의 등장 이후 모두 넋이 나간 채 명절마다 성룡 영화만 기다리며 한국액션영화의 독창성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그 시기, 김영일 등 홍콩에서 활약했던 몇몇 배우와 이두용 사단의 막내급이었던 정진화 등이 김정용 감독과 함께 일련의 짝퉁 무협영화들을 양산하기 시작했다. <복권>(1980), <소림사 주방장>(1981), <무림 걸식도사> 등 한국을 중국처럼 꾸미고 버젓이 소림사까지 등장시킨 이 영화들에서 정진화가 성룡처럼 장난기 가득하게 등장하고, 김영일이 늘 흰 눈썹과 수염을 달고서 악역을 도맡았던 이 영화들은 당시 홍콩무술영화에 대한 뻔뻔한 모방이었지만 이두용의 태권액션영화로부터 계승된 듯한 특유의 액션스타일과 호쾌한 발차기 위주의 액션은 반짝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1990년이 채 되기도 전 이른바 ‘개인기’를 지닌 이들 액션배우들은 하나둘 자취를 감추고 만다. 이두용의 마지막 액션영화인 <흑설>(1990)과 <장군의 아들>을 전후로 한국액션영화는 긴 침체기를 겪었다. 1990년을 전후로 그 즈음의 액션영화 인력들은 김청기와 남기남, 그리고 얼마 뒤의 영구아트무비의 아동오락 영화들과 몇몇 TV 사극액션드라마들을 통해 생계를 유지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의 배우나 스턴트맨을 거쳐 현재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무술감독은 <우뢰매>(1986-) 시리즈에 참여했던 류창국과 <슈퍼 홍길동>(1987-) 시리즈에 참여했던 원진 정도다. 현재 맹활약 중인 정두홍, 전문식, 이응준 무술감독 등도 당시 아동오락 장르로부터 그리 멀지 않다. 그렇게 짝퉁무술영화의 세계는 현재 한국액션영화와 가장 직접적인 계보로 이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