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신(肉身)의 길에서 만난 두 배우 주한독일문화원과 공동주최하는 11월 기획전 “김승호 mit Emil Jannings”

by.김한상(한국영상자료원 연구원) 2008-11-13조회 830

The way of all flesh. 살이 붙어있는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같은 길을 가게 된다. 배우의 삶, 스타의 삶도 그렇다. 한 시대를 거머쥐고 모든 이의 시선을 받던 이가 어느덧 조금씩 시야 밖으로 밀려나다가 마침내 잊혀지고 만다는 진부하다면 진부한 ‘스타의 생애’는 땅 위의 모든 육신의 길을 압축적이고도 급격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여기 소개하는 두 배우, 에밀 야닝스와 김승호도 그런 길을 걸었다. 눈부시게 높은 지위까지 치솟았던 두 사람의 명예는 변모한 세상의 흐름 속에서 어느새 덧없는 옛이야기처럼 되었다. 그리고 그 길에서 두 배우는 만난다.

빅터 플레밍이 감독한 1927년작 <육체의 길(The Way of All Flesh)>에 출연할 당시 에밀 야닝스는 고군분투하는 중이었다. <마지막 웃음>, <파우스트> 등 지금도 제목만으로 알 수 있는 작품들에서 강렬한 연기를 선보이며 ‘무성영화 시대’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배우로 군림하던 그는 그 후광을 업고 할리우드로 진출한 터였다. 그러나 봇물처럼 터져 나온 발성영화의 붐은 영어를 잘 못하는 독일인 배우에게 치명타였다. <육체의 길>로 호평을 받고 오스카상까지 수상하지만 마침내 그는 귀국을 결심한다. 세계 스타의 꿈을 접고 불명예스럽게 귀환한 그가 선택한 길은 철저하게 ‘조국’의 배우가 되는 것이었다. 나치영화를 대표하는 감독 파이트 하를란의 <지배자>, 영국과 전쟁을 벌인 보어인들을 통해 나치스의 당위를 보여주는 <크뤼거 아저씨> 등에 출연하며 재기에 성공한 그는 제3제국의 선전상 요제프 괴벨스로부터 “조국예술인(Kunstler des Staates)”이라는 칭호를 얻는다. 그러나 그렇게 선택한 길은 또 다른 내리막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2차대전의 패전으로 그의 입지는 철저하게 봉쇄되었고, 오스트리아로 쫓겨난 후로 다시는 영화에 출연할 수 없었다(그래서 이 시기의 야닝스는 우리에게 무척 낯설다. 나치영화는 아니지만 <트라우물루스>, <로버트 코흐>, <비스마르크의 퇴진> 등 30~40년대를 대표하는 작품들은 대부분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 않다).

김승호에게 있어 <육체의 길>은 인생이라는 커다란 산의 오르막과 내리막에 하나씩 자리 잡은 이정표와도 같다. 야닝스가 출연한 라요스 비로 원작의 할리우드 영화를 조긍하 감독과 리메이크한 1959년의 그는 눈부시게 빛나는 시기를 맡고 있었다. <시집가는 날>의 성공으로 시작된 ‘영화배우’ 김승호의 삶은 당분간 탄탄대로만이 펼쳐져 있었다. <마부>나 <로맨스 그레이>에서의 어깨 힘 빠진 아버지상으로 그는 당대를 대표하는 ‘국민아버지’가 되었고,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 같은 작품에서는 카리스마 넘치는 사극 연기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런 그도 정치권력의 요구에 못 이겨 <독립협회와 청년 리승만> 같은 선전영화에 출연했지만 4.19의 거센 물결도 그의 지위를 당장 떨어뜨리진 못했다. 하지만 급부상한 청년세대의 출현과 청춘영화의 유행은 이 대배우에게도 내리막길이 찾아왔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김승호는 <돌무지> 같은 영화를 직접 제작까지 하면서 고군분투했지만 시대는 이미 그의 것이 아니었다. 1967년 조긍하 감독과 다시 힘을 합친 <육체의 길>에서, 돌아서는 그의 힘없는 뒷모습은 배우 자신의 마지막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The Way of All Flesh”라는 동명소설을 쓴 영국 작가 새뮤엘 버틀러가 말했던가. “잊혀지지 않은 자는 죽은 것이 아니다.” 이번 기획전에서 그 길을 거슬러 올라가보자.

(※ <지배자>와 <크뤼거 아저씨>는 사전 신청자에 한해 관람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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